교과서 용어 해설유형별 > 전체

경성 제국 대학

제목 경성 제국 대학
한자명 京城帝國大學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일제가 경성에 설립한 일제 강점기 유일한 종합 대학.

[내용]

3⋅1 운동이라는 조선인의 거국적인 저항에 대응하여 일제는 이른바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지만, 그 내용은 기만적인 것이었다. 1922년 제2차 「조선 교육령」의 공포로 한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학제를 동일하게 하고 차별을 없앴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는 달랐다.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와 ‘상용하지 않는 자’로 구분하여 초등 교육부터 차별하고, 중등 교육은 불일치하는 등 여전히 다른 학제를 운용하면서 차별하였다. 그런데 제2차 「조선 교육령」의 공포로 식민지 조선에서도 대학 설립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일제는 대학 설립 계획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시도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광범하게 전개되었던 한국인의 자주적인 민립 대학(民立大學) 설립 운동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0년 6월 이상재(李商在)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 교육회’ 설립이 추진되었는데. 이때부터 한국인의 자주적인 민립 대학 설립을 결의하였다. 1922년 「조선 교육령」이 개정되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22년 11월 이상재, 송진우(宋鎭禹), 이승훈(李昇薰) 등이 중심이 되어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결성되었다. 1923년 3월 전국 각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선출된 460여 명의 발기인이 모여 전국적 행사로 민립 대학 발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전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직간접적으로 이를 탄압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23년 11월 조선 제국 대학 창설 위원회를 발족하여 관립 대학 설립을 서둘러 추진했다. 이로써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되었다.

1924년 6월 예과가 개교했고, 예과 졸업생들이 배출된 1926년부터 법문학부와 의학부, 두 개 학부가 정식으로 개교했다. 제국대학 입학 자격은 고등학교 졸업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과 달리 고등학교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학교나 고등보통학교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2년제 예과(豫科)를 설치하였다.(1934년부터 3년제) 예과 설치는 일본 본국의 제국 대학과 달리 한 단계 낮은 제국 대학으로서의 차별성을 부여한 것이었다. 예과는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선발했고, 이과 수료자는 의학부로, 문과 수료자는 법문학부로 진학했다. 법문학부는 법학 계열(법학)과 문학 계열(문학, 사학, 철학)이 합쳐져 있었는데 학생들은 관료 진출에 유리한 법학과를 선호하였다. 의학부는 기존의 의학 전문학교만으로는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설치되었다. 이공 계열 학부가 설립되지 않은 것은 상공업 진흥이 정책적으로 억제되었던 왜곡된 식민지 경제 구조 속에서 일제가 설립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전쟁 수행을 뒷받침할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해 1941년 이공학부가 설치되었다. 법문학부 건물은 경성 종로구 동숭정(현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에, 의학부는 그 맞은편인 연건정(현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에 있었다. 이공학부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예과는 경성부 청량리정(현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위치했다.

경성 제대의 설립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관학 아카데미즘(academism)의 담당 기관이 되어 일제의 식민 지배와 대외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인의 민족 해방 운동에 대응해 일제는 식민 지배를 학문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을 조선에서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또 만주와 중국으로 침략하기 위해서 그 지역에 대한 언어와 역사, 문화 등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었고, 그 연구 거점이 경성 제대였다. 둘째, 식민지 체제 유지에 필요한 한국인 엘리트가 필요했다. 이들을 육성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경성 제대가 설립된 것이다. 제국 대학은 특히 관료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는데, 젊은 조선인 엘리트를 식민 지배를 위한 관료로 편입시키는 교육이 이뤄졌다.

일제는 경성 제대를 설립하여 조선에서의 고등 교육 기회를 부분적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조선에 설립된 대학은 경성 제대가 유일했고, 다른 대학의 설립은 억제되었다. 경성 제대는 1929년 68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1942년까지 1,84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반도에 있는 대학임에도 졸업생 중 한국인은 627명으로 전체의 1/3 수준이었다. 한국인은 매년 수십 명 내외에서만 입학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매우 제한된 기회였지만 한국인들에게 경성 제대 졸업장은 출세를 보장하는 길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관공서와 학교 등에 진출해 식민지 엘리트로서 성장했고, 해방 이후에도 정계와 관계, 학계 등에 지배 엘리트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갔다. 그렇지만 이렇게 출세를 지향한 학생 외에 민족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도 다수 있었다. 반(反)관학을 표방하며 지식인으로서 조선 사상계에서 활동하거나 민족 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존재했다. 1931년에는 학생 비밀 결사 조직으로서 ‘경성 제대 반제 동맹’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 제대는 경성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경성대학이 1946년 8월 미 군정에 의해 폐교되면서 그 시설은 이후 국립 서울대학교로 흡수되었다.

▶ 관련자료

ㆍ경성 대학(京城大學)
ㆍ경성 제국 대학(京城帝國大學)
ㆍ경성 제대(京城帝大)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