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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

제목 다이쇼 데모크라시
한자명 大正 Democracy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0~1920년대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 나타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경향.

[내용]

다이쇼[大正]는 일본의 제123대 일왕인 요시히토(嘉仁, 1879~1926)의 연호로, 그 기간은 1912년부터 1926년까지이다. 이 기간을 전후로 하여 일본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민주주의 풍조가 고양되었다. 정치적으로 정당 정치의 확립, 경제적으로는 국가 통제로부터 자본의 자립, 사회적으로는 남녀 평등과 노동자의 단결권 요구 등 자유 확대, 문화적으로는 대학의 자치와 출판 저널리즘의 발전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시노부 세이사부로(信夫淸三郞)가 그의 책인 『다이쇼 데모크라시사』(1954)에서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학술 용어로 정착했다. 시작 시점은 1905년 히비야 방화 사건부터 보는 것이 보통이며, 끝은 1925년 다이쇼 말년과 1931년 만주 사변 이전까지로 보는 견해가 갈리고 있다. 히비야 방화 사건은 1905년 9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체결된 강화 조약에 배상금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집회를 갖고 내무대신 관저와 언론사 등을 불태운 일을 말한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사건은 확대되었고, 정부 비판의 주체로서 ‘국민’이 등장했다는 점이 상징적이었다.

1912년 육군이 중국 침략을 노리며 조선에 주둔하는 사단의 증설을 요구하다가, 정부 내부의 갈등이 빚어져 12월에 내각이 교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육군과 번벌(藩閥) 세력이 무리한 사단 증설을 위해 번벌 세력의 주요 인물이었던 가쓰라 타로(桂太郞)를 내세워 후계 내각을 수립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코쥰샤(交詢社)를 중심으로 한 자본가들의 지원 속에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이누카이 쯔요시(犬養毅) 등 자유주의 정치가들을 중심으로 광범한 대중적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1913년 2월 가쓰라 내각이 총사직했다.(제1차 호헌 운동). 이후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사회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한편 일본 경제가 발전하면서 도시 중간층이 확대되었고, 교육 기회의 확대로 교육받은 청년층과 지식인의 저변이 넓어졌다. 각종 언론 매체에서는 민주주의 사조 및 민주 정치 체제에 대한 소개와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특권적 사회 질서와 체제를 타파하고 근대적 시민 사회와 국가 체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지향이 확대되었다. 더 나아가 이런 움직임은 사회와 문화 및 예술의 각 분야로, 그리고 학문과 운동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기반으로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한 일본 중의원 유권자들을 대폭 확대하기 위한 보통선거제 실시, 각종 정치적 자유 획득 등이 주장되었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이러한 풍조를 일본 특유의 민주주의인 민본주의(民本主義)로 이념화했으며,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는 천황기관설을 주장하여 일왕의 신격적 절대성을 부정하고 정당내각제의 합헌성을 부여하여 의회 정치의 근거를 제시했다.

한편 1918년 7월 시베리아 출병 등 쌀 수요 증가를 틈탄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생활이 어려워진 대중들의 대규모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쌀 소동) 이 저항은 정부의 경제 실정과 특권적이고 비민주적 국가 사회 체제 운용에 대한 각계각층의 누적된 불만과 결합하여 2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를 계기로 특권 정치의 폐지와 정당내각제의 확립, 노동조합의 자유 등의 주장이 널리 확산되었다. 그 결과 특권 번벌 내각이었던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내각이 사퇴하고, 최초의 본격적 정당 내각이라 불리는 정우회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이 성립하였다. ‘쌀 소동’에서의 민중의 투쟁 경험과 함께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노동자, 농민의 정치적 자각이 고조되었고, 사회주의가 급속히 영향력을 확대했다. 여러 단체의 운동을 통해 언론⋅출판⋅집회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확대되었으며, 보통선거제 실시를 주장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우회가 분열하고, 기요우라 게이고(淸浦奎吾) 내각에 반대하는 제2차 호헌 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24년 6월 헌정회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수상으로 하는 호헌3파 연립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제 보통선거제의 실시는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25세 이상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중의원선거법이 개정되었다.(1925년) 이후 1932년까지 정우회와 헌정회(1927년 정우본당과 통합하여 민정당으로 개칭) 양대 정당이 교대로 내각을 조직하는 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1928년에는 보통 선거에 따른 중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노동자 농민의 무산 세력이 중앙과 지방의 의회에 진출했다. 노동자 농민의 단결권과 쟁의권이 형식적으로라도 공인되었으며, 노동조합도 크게 확대되었다. 또 여성에게 지방 의회 선거권을 부여한 법안이 1930년에 통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존 정당 세력은 치안유지법을 제정하고(1925년) 여러 차례에 걸쳐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노동조합법이나 소작법 등 노동자 농민의 권리 보장을 위한 법안 제정에는 소극적이었다. 또한 자본과 결탁하여 부정부패가 확산되었다. 1920년대 정당 정치는 일본에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하였고, 군부 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의 위기가 닥치고 1931년 군부 주도로 만주 사변이 일어나면서, 군부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정당 정치는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을 걸으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흐름도 완전히 막을 내렸다.

▶ 관련자료

ㆍ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Democracy)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