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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사변

제목 만주 사변
한자명 滿洲事變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일본, 중국
유의어 만주 침략(滿洲侵略), 9⋅18 사변(九一八事變)
별칭•이칭

[정의]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류타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일으키며 시작된 만주 침략 전쟁.

[내용]

일제는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1919년 이후 관동청)를 두고 국책 회사인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만철)와 철도 수비대로서 관동군을 통해 남만주 일대에서의 지배권을 확보해 갔다. 나아가 일제는 가상 적국으로서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조선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간도 일대를 지배하여 민족 해방 운동을 탄압하고 조선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서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런데 1926년 7월 중국 남쪽 광둥성(廣東省)에 있던 중국국민정부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1차 국공 합작을 기반으로 북벌을 소련의 지원하에 시작하였다. 북벌은 중국 민중의 적극적 호응 속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비록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쿠데타와 뒤이은 공산당의 무장 봉기로 제1차 국공 합작이 무산되고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북벌의 기세가 많이 꺾이기는 했지만, 국민당 주도의 북벌은 계속되었다.

북벌군의 중국 통일이 가시화되자, 일본은 만주와 몽골 지역을 중국과 분리시켜 자신의 지배 영역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관동군은 그동안 지원했던 펑톈 군벌(奉天軍閥) 장쭤린(張作霖, 1873~1928)을 제거하고(1928년 6월 장쭤린 폭살 사건) 직접 만주 일대를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 1898~2001)은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저항하여 만주의 주도권을 다시 회복했고, 만주에서는 일본에 대항하여 국권 회수 운동이 고양되는 등 중일 간 분쟁이 빈발했다.

한편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일본 내 사회 경제적 불안이 확산되는 가운데, 일본의 군부와 재계는 만주 침략을 통해 활로를 찾으려고 침략 여론을 강화했다. 만주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이 발생했고, 상하이 등지에서는 일본 배척 운동이 확산되었다. 만주 침략 준비를 끝낸 관동군은 9월 18일 펑톈 북동쪽 류타오후 부근을 지나는 만철 선로에 폭약을 가설해 폭파한 뒤 중국군의 소행으로 가장하고, 이를 명분으로 중국군 병영을 기습 공격했다.(류타오후 사건)

당시 일본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입헌민정당 내각은 중국에 대한 무력행사가 국제 조약에 어긋나기 때문에 19일 즉시 사태의 불확대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내각은 관동군을 통제할 수 없었고 육군 수뇌부는 관동군의 행동을 사실상 묵인했다. 일본의 보수 세력과 군국주의 세력은 이를 적극 지지했으며, 만주 점령에 큰 이해를 가진 재계도 이를 환영하였다. 21일 관동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조선군은 본국 정부의 허가도 없이 독단으로 국경을 넘어 펑톈으로 진공했다. 육군은 이 독단 월경의 사후 승인을 얻어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만주로의 무력 침략을 ‘자위권 발동’으로 강변했으며, 관동군은 전격적인 군사 작전으로 만주 전역을 점령해 갔다.

이에 중국은 국제 연맹에 일본의 침략 행위를 호소했고, 국제 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해 상황을 조사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기 직전인 1932년 3월 1일 꼭두각시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만주에서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당시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최대 관심은 세계 대공황에 대처하여 자국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 행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국제 연맹의 조사단이 만주국을 부인하고 만주 지역을 열강이 공동으로 관리할 것을 제안하자,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

▶ 관련자료

ㆍ만주 사변(滿洲事變)
ㆍ만주 침략(滿洲侵略)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