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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병 제도

제목 지원병 제도
한자명 志願兵制度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일제가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해 「육군 특별 지원병령」과 「해군 특별 지원병령」 등을 공포하여 한국인을 전쟁에 반강제적으로 동원한 제도.

[내용]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6월, 조선군사령부는 일본 육군의 지시를 받아 조선인에 대한 병력 동원 계획을 수립했다. 지원병 제도는 장기적으로는 징병제를 조선에도 시행한다는 목표 아래 과도적인 형태로 실시되었다. 이는 한국인을 군대에 수용하여 일본 정신을 철저히 함양시켜 제대 후에는 황국 신민화(皇國臣民化)를 이끌어갈 인물로서 키우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인의 일본어 보급률이 저조하고, 한국인에게 군사 기술과 무기를 제공하는 것에 위험을 느꼈다. 그렇지만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전장이 중국 전체로 확대되면서 안정적인 병력 보급이 절실히 요청되자, 우선 소규모 차원에서 지원병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1938년 2월 22일 「육군 특별 지원병령」이 공포되고 4월부터 실시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지원병 자격을 엄격히 제한했다. 첫째, 만 17세 이상인 남자, 둘째,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사상이 견고하고 신체 및 정신에 이상이 없는 자, 셋째, 6년제 소학교(오늘날 초등학교)를 졸업하거나 그와 동등한 학력자, 넷째, 입소 및 복역 중 일가의 생계와 가사에 지장이 없는 자로 정한 것이다. 또 전형 과정에서는 각 도에서의 학과 시험과 일본어 구두시험이 진행되고, 민족 운동에 가담한 자의 입대를 배제하기 위한 군과 경찰의 엄격한 심사가 이뤄졌다.

조선인 특별 지원병은 1938년에 400명을 선발했지만, 점차 늘어나 1940년 3,000여 명, 1943년 육군 6,300여 명, 해군 3,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1943년 7월 27일 「해군 특별 지원병령」이 공포되면서 지원병 제도는 해군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과 해상 전투가 빈번히 이뤄지면서 일본의 해군 병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었다.

조선 내 군 지원자 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1938년 당시 군 훈련소 개설 전에는 400명 정원을 겨우 충족했지만, 1943년도에는 30만 3천 명을 넘어 지원하였다. 이렇게 지원자가 급증한 이유는 첫째, 일제 권력에 의한 철저한 강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친일 지식인을 동원해 지원병 모집을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고 각 행정 구역에 지원자 수를 할당시켜 강제로 지원자 수를 늘렸다. 둘째, 지원자 및 그 가족에 대한 우대책이 취해졌기 때문이다. 병역을 마친 이에게는 희망에 따라 경찰관이나 소방서원 등 관공리에 채용하거나 가족들에게 자금 융통의 혜택을 주는 등 일제의 회유책이 있었다. 셋째, 1930년대 농촌 사정이 좋지 못했다. 농민들은 경제적으로 극도로 궁핍해진 가운데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이민을 가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에 군대에서 호구책을 마련하려는 ‘어쩔 수 없던 상황’에 놓였던 것이다. 실제 지원자의 대다수는 소작농 등 빈농들이었다.

한편 일제는 징집을 연기하고 있던 학생들에 대해서도 ‘학도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재학 기간을 단축하고 징집 연기를 폐지해 일본군으로 동원했다. 일제는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에 기초하여 1943년 10월 「소화18년도(1943년도) 육군 특별 지원병 임시 채용 규칙」을 공포하고 지원서를 접수했다. 징병 검사를 통과한 만 20세 이상의 대학 및 전문학교에 재학 또는 졸업한 한국인 학생들은 1944년 1월부터 일본 군대로 동원되었다. 입영 후에 관련 지원 서류를 제출할 수 있게 한다든가, 법령 공포 후 3개월 만에 입영이 이뤄진 점, 징집 대상자의 100% 지원을 목표로 한 점에서 ‘지원’의 성격보다는 강제적 성격을 띠었다. 학도 지원병은 일반 지원자들과 상징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이 직접 나서서 지원을 독려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 한국인 학생들이 지원을 거부해 도피하거나 입영 후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런 지원병 제도 운영의 경험을 기반으로 태평양 전쟁 이후 전쟁 상황이 악화하여 병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1944년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시행하였다.

▶ 관련자료

ㆍ지원병 제도(志願兵制度)
ㆍ학도 지원병 제도(學徒志願兵制度)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