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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명배금

제목 친명배금
한자명 親明排金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숭명배금(崇明排金), 배후금향명(排後金向明)
별칭•이칭

[정의]

반정(反正)을 통해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을 폐위하고 정권을 잡았던 인조(仁祖, 재위 1623~1649) 정권이 명(明)을 중시하고 후금(後金)을 멀리하겠다면서 내세웠던 외교 정책의 방향.

[내용]

인조는 1623년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폐위하고 재위에 올랐다.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해야 하는 이유로 그의 10가지 죄악을 제시했다.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했다[廢母殺弟]’는 사유 외에 9가지의 죄상 중 외교에 관한 내용이 중요하게 언급되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 주었던 명의 은혜[再造之恩]를 잊고 오랑캐 후금에게 성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폐위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처럼 인조 정권은 명에 대해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폐위했기 때문에 외교 정책에서 친명적 태도를 보여 주는 동시에 후금과의 관계에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인조 정권의 이러한 외교 정책과 태도를 ‘친명배금’ 혹은 ‘숭명배금(崇明排金)’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인조는 후금을 정벌해서 명에 대한 은혜를 갚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인조는 즉위 직후부터 이괄(李适)의 난 등으로 국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후금은 점차 강해지고 명은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친명배금의 외교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오로지 인조 정권의 한계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외교 방향은 명을 중심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후금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조 정권 역시 친명적 외교 정책 기조를 지속하기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인조 정권은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도 기본적으로 숭명배금 정책을 취했지만 현실적 여건상 후금을 외교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관련자료

ㆍ척화 배금(斥和排金)
ㆍ친명 배금(親明排金)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