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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제목 노론
한자명 老論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노당(老黨)
별칭•이칭

[정의]

조선 후기 붕당 정치 심화에 따라 서인(西人)에서 분파된 정파(政派).

[내용]

1. 붕당 정치 속 노론의 발생

조선 시대는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사림(士林)이 정권을 잡은 후 학파와 지역적 차이 등에 따라 붕당을 형성했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사후 훈구(勳舊)와 척신(戚臣)에 대한 입장 차이 등으로 생겨난 동인과 서인은 이후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분당(分黨)을 거듭했다. 동인은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었다.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때 주요 당파로서 송대 이후 등장한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하는 서인은 한당유학(漢唐儒學)을 절충적으로 수용하려는 남인과 예설(禮說)을 두고 충돌하였는데, 현종 사후 숙종 즉위 초 주도권을 잡았던 것은 남인이었다. 이때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환국을 통해 남인을 견제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고, 서인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정권을 잡았다. 이때 서인의 집권은 남인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을 한 서인 내 김석주(金錫冑), 김익훈(金益勳) 등의 정치 공작에 힘입은 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들이 보인 비정상적인 행위는 서인 내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평가를 두고 남인의 동태 감시, 밀고, 외척 개입 등이 종묘사직의 안정과 대의(大義)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과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 도에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전자가 노론이 되었고 후자가 소론이 되었다. 여기에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그 제자인 윤증(尹拯, 1629~1714)이 송시열에게 부탁한 윤선거(尹宣擧, 윤증의 아버지)의 묘갈명 내용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된 사건도 대립을 더욱 확대시켰다. 이로써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 윤증은 소론의 영수로 갈라서게 되었다.

2. 노론과 소론의 대립

이후 서인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을 계기로 재집권하였다. 장희빈이 사사(賜死)되면서 그 아들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을 보호하는 문제로 노론과 소론은 대립하였고, 그 과정에서 경종의 동생 연잉군(延礽君, 후의 영조)을 후원하였던 노론 대신이 경종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처형되는 사건(임인옥사)을 겪으면서 소론과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영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노론은 조정에서 우위를 보였지만,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탕평책으로 남인과 소론이 조정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정조 사후 19세기의 세도 정권하에서 노론은 권력을 독점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더 이상 정파로서의 의미는 찾을 수 없었다.

3. 노론의 성격

노론은 율곡 이이(李珥)를 종장(宗匠)으로 하여, 김장생(金長生)⋅송시열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승을 정통으로 중시하였다, 또한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사족(士族)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노론은 의리 수호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합리화하면서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여타의 당파에 의해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노론 내부에서 벌어진 호락논쟁(湖洛論爭)을 통해 타인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려는 시각이 등장했고, 이는 실학의 한 분파인 북학파로 이어졌다.

▶ 관련자료

ㆍ노론(老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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