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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

제목 기호학파
한자명 畿湖學派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기호 사림파(畿湖士林派), 기호 성리학(畿湖性理學), 기호 성리학파(畿湖性理學派), 주기파(主氣派)
별칭•이칭

[정의]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스승으로 삼은 학파.

[내용]

경기도, 충청도 등지를 기호 지방이라고 하는데, 율곡 이이를 종장(宗匠)으로 모신 학자들이 주로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기호학파라고 한다. 이에 대비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므로 영남학파로 불린다.

기호학파는 정파적으로 파악했을 때 서인과 연결된다.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인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형성될 무렵 분쟁과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후 제자들에 의해 서인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이이의 평생지기이기도 했던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그리고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역시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황(李滉)은 순선(純善)한 리(理)의 지위를 높이고자 이가 능동성을 가져 발현한다는 이발(理發)을 주장했던 것과 달리 이이는 리(理)는 현실의 사물처럼 활동성을 가진 것이 아니므로 이발(理發)이라는 표현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리는 다만 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보아 기발이승(氣發理乘)만을 인정하였다.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은 기질을 통해 리(理)를 발현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리 자체를 부정하거나 낮추어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황의 학설을 주리론(主理論)이라 하고 이이의 학설을 주기론(主氣論)이라 하는 것은 사실 정확한 설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이와 달리 송익필은 형이상학보다는 예(禮) 통한 도덕의 확립에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송익필의 학문은 이이의 학문과 함께 예학(禮學)에 뛰어났던 김장생으로 이어졌고, 다시 존주의리(尊周義理)를 강조한 송시열로 이어져 하나의 학통이 세워졌다. 송시열은 주자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통일된 사상 체계를 정립하려고 하였다.

우계 성혼은 퇴계의 학설을 일부 수용하는 절충적 입장을 가졌으며, 그의 학문은 이이, 송익필 중심의 학맥과 구별되는 우계학파로 이어졌다. 성혼의 학문은 사위인 윤황, 윤황의 아들인 윤선거와 그 아들인 윤증 부자로 이어졌는데,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이후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갈라졌을 때 윤증은 소론에 속하였다. 그와 더불어 박세채, 박세당 등 소론계 학자들은 주자학에 철저한 노론계 학자들에 비하여 좀 더 탄력적인 학풍을 지녔다. 따라서 후에 박세채와 윤증의 문인이며 양명학의 대가인 정제두 같은 학자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노론계 학자들로서 송시열의 제자들은 인물성동이 논쟁(人物性同異論爭)을 벌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들로 인물성동론에 이간(李柬), 이론에는 한원진(韓元震)이 있다. 동론을 지지한 이들은 경기 지역에 주로 거주하여 낙론(洛論), 이론을 지지한 이들은 충청 지역에 거주하여 호론(湖論)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논쟁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주자의 경전 주석에 상반된 면이 있어 촉발되었다. 그러나 비록 주자의 개념 사용에 대하여 명확히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지만, 그 논쟁 과정을 통해 오히려 기존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며 이용후생학파, 북학파 등의 실학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의의]

주자학을 기반으로 하는 기호학파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상의 경직성을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의 호락논쟁을 통해 북학파라는 새로운 사상적 조류를 만들기도 하였다.

▶ 관련자료

ㆍ기호학파(畿湖學派)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