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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노동 공제회

제목 조선 노동 공제회
한자명 朝鮮勞動共濟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20년 설립된 최초의 전국적 노동 단체.

[내용]

조선 노동 공제회는 1920년 4월 11일 창립총회를 열고 회원 678명이 가입한 가운데 출범하였다.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조선 노동 공제회 선언문에는 노동자들이 “민족적, 계급적으로 이중의 압박과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우리는 압박과 착취와 굴욕을 묵인하지 않는 무저항의 저항으로써 민족적, 계급적으로 해방될 때까지는 항상 임전의 태세로써 생활할 것을 각오”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선 노동 공제회는 개인 자격으로 회원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진보적 지식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계몽 활동에 주력하였다. 1920년 8월부터 서울에 노동 야학을 설치해 운영했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1년 7월에는 한국 최초의 소비조합 상점을 서울 관수동에 건립해 노동자들에게 식량과 일용 필수품을 공급하는 활동을 벌였다. 조선 노동 공제회는 기관지로 『공제(共濟)』를 발행했다. ‘공제’는 힘을 합하여 서로 돕고, 함께 일한다는 의미였다. 1920년 9월에 창간호를 내고 10월에 제2호를 발행했지만, 일본 경찰에 편집진이 체포되고 제3호부터 제6호까지의 원고도 압수당하며 발행이 중단되었다. 다음 해인 1921년 제7호와 제8호가 속간되었지만, 제9호부터 다시 원고가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면서 더 이상 발행되지 못했다.

조선 노동 공제회의 적극적인 활동 결과, 1921년 3월에는 서울 6,700여 명과 지방 11,000여 명에 이르는 회원이 가입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지식인과 청년들 외에도 신문배달부, 연초공, 인쇄공, 지게꾼 등도 많이 참여했으며, 지역 조직도 대구 지부를 시작으로 평양, 안악, 개성, 정읍, 군산, 신창, 신천, 광주, 안동, 인천, 영주, 청진, 진주, 경주 등의 지부를 설치하며 전국 조직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조선 노동 공제회가 1922년 4월 제3회 대회에서 소작인 조합의 결성을 결의하고, ‘소작인은 단결하라’는 선언을 발표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소작인회, 소작 조합 등의 농민 단체들이 급속하게 결성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1922년 하반기 이후 조선 노동 공제회 내부에서 조직과 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이념과 노선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내의 다양한 이념적 경향과 사회주의 운동 분파들 간의 노선 대립이 지속되는 가운데, 1924년 4월 출범한 조선 노농 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으로 다른 노동 단체와 함께 통합되었다.

▶ 관련자료

ㆍ조선 노동 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