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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 시찰단

제목 내지 시찰단
한자명 內地視察團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일제 식민 통치에 협력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거나 협력에 대한 대가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한국인에게 일본을 여행하면서 일본의 우수성을 느끼게 할 목적으로 조선 총독부나 관변 기관이 조직한 여행 조직.

[내용]

일제는 일본 본국을 ‘내지’, 조선과 대만 등 식민지를 ‘외지’라 불렀다. 외지인이었던 많은 한국인들은 취업이나 유학을 위해 내지인 일본으로 향했다. 생계나 학업을 위한 목적 외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여행을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소수의 일부 부유층은 개별적으로나 단체를 구성해 일본을 여행했다. 이러한 개별적인 여행 외에 조선 총독부와 지방 관청 및 관변 기관(특히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 등 관변 언론사)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조선인들을 ‘내지 시찰단’으로 일본에 보냈다.

1909년 4월 한국 통감부의 관변 신문사인 경성일보사는 고위 관료 출신의 양반과 실업가 등 94명의 조선인으로 관광단을 조직해 약 한 달에 걸쳐 일본 여행을 보냈다. 관광단은 일본의 주요 도시를 여행하며 해군 시설, 조폐국, 시멘트 회사, 방적 회사 등의 산업 시설과 역사 문화 유적을 시찰했다. 이 관광단이 성과를 올린 것으로 본 경성일보사는 이듬해 4월에도 일본 관광단을 조직했다. 1910년대에는 경성일보사를 포함해 매일신보사, 동양 척식 주식회사(동척) 등이 일본관광단을 조직했다.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는 각기 또는 공동으로 시찰단을 꾸렸다. 동척의 경우 1911년부터 거의 매년 50~60명의 일본 관광단과 농사 시찰단을 조직했다. 한말부터 1910년대까지의 시찰단은 대체로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에 협조한 이들에 대한 보상, 관료와 유생들의 의식 전환, 관료들에 대한 교육 등을 시찰 목적으로 하였다.

1920년대 이후 시찰단에는 군수와 면 직원 등의 관리층, 지방 자문기구로서 도평의회와 면협의회의 공직자층, 교원 및 청년 회원, 금융 조합 직원 등으로 참여자가 이전보다 확대되었다. 시찰을 다녀온 이들은 공통적으로 공업 발달과 근대화된 도시, 많은 신사, 정비된 농경지, 교육 시설의 정비, 울창한 삼림, 편리한 교통 등을 소감으로 남겼다. 또 일본이 역사 문화 유적을 많이 남기고 있던 점도 높게 평가했다. 1930년대 전시 체제기에 들어서면서 전시 동원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상 보국 연맹, 육군 지원병, 사상 전향자, 통제 경제를 학습하기 위한 경제인 등이 시찰단에 포함되었다. 이 시기의 시찰단은 이전에 일본의 근대 문물과 제도의 우수성을 확인했던 것에서 더 나아가 신사나 신궁(神宮) 등 일본 정신과 황국 신민의 의식을 강조하는 지역과 시설을 반드시 여행하도록 했다.

결국 일제 강점기의 일본 시찰은 이에 참여한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일본관을 심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상당수 시찰단원들은 조선과 일본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조선의 낙후성을 인식하고 일본을 선망하기도 했다. 내지 시찰은 시찰단원들이 식민 통치에 협력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거나 협력에 대한 대가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었으며, 총독부 등 시찰을 기획한 이들의 의도가 어느 정도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