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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 회의

제목 파리 강화 회의
한자명 Paris講和會議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프랑스
유의어 파리 강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 파리 평화 회의(Paris平和會議), 베르사유 강화 회의(Versailles Peace Conference), 베르사유 회담(Versailles會談)
별칭•이칭

[정의]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의 강화(講和)를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회의.

[내용]

파리 강화 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후 새로운 전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1919년 1월 18일부터 같은 해 6월 28일까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의 민족 자결주의에 고무된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 자결주의가 관철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독립에 대한 희망을 안고 여러 세력에서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러시아에서 설립된 대한 국민 의회에서는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을, 상하이의 한인 청년들을 주축으로 조직된 신한 청년당에서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파리로 파견하였다. 이 외에 유림(儒林)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서명을 모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기도 하였다.

김규식은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하였다. 파리로 출발할 때 신한청년단 대표였던 김규식은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자, 임시 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부 대표가 되었다. 임시 정부를 대표하게 된 김규식은 「독립공고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을 만나 한국 문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던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외면으로 한국 문제는 파리 강화 회의의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했다. 한편 대한 국민 의회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윤해와 고창일은 파리 강화 회의가 마무리된 9월에 도착하여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못하였다. 한국인의 기대와는 달리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의제로 상정조차 되지 못하면서 외교적 노력을 통한 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 관련자료

ㆍ1919년 제 1 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과 패전국이 전후 배상문제를 놓고 벌인 국제 회의
ㆍ파리 강화 조약(Paris講和條約)
ㆍ파리 강화 회의(Paris講和會議)
ㆍ파리의 강화 조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