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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

제목 수군
한자명 水軍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선군(船軍), 기선군(騎船軍), 수사(水師), 수졸(水卒), 주군(舟軍), 주사(舟師)
별칭•이칭

[정의]

수상(水上)에서 전투를 담당한 군대.

[내용]

고려 시대 이전에도 수군은 존재하였으나 제도적으로 정비되지 못하고 육군을 보조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해안 방어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하였고, 그 결과 조선은 건국 이후 수군 제도를 정비하였다. 해안 거점마다 수군진(水軍鎭)이 편성되었고, 수군진에는 병선과 병력이 배치되어 왜구 방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 기록에 의하면 당시 수군은 육군보다도 훨씬 많은 수가 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일본과의 관계 개선으로 왜구의 침입이 서서히 종식되었고, 이에 따라 수군의 규모도 점차 축소되어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에 이르면 육군이 약 7만 명, 수군은 약 5만 명 수준으로 재조정되었다.

수군의 군역은 일반 양인이 담당하였으나 육군보다 근무 조건이 열악하였다. 육군의 경우 8개 조가 2개월씩 근무하는 것이 법규였던 반면, 수군은 2개 조가 1개월씩 번갈아가며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1년에 6개월을 근무하는 셈이었다. 또한 수군은 둥근 패를 항상 차고 다녀야 했으며, 수군의 자식은 계속 수군역(水軍役)을 지도록 법제화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의 경우, 수군은 항상 배 위에서 생활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군역 수행 역시 상당한 고역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수군역을 피하려는 백성들이 많아졌고, 이로 인해 수군의 수가 줄어들게 되자 남아 있는 수군들의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또한 16세기부터 만연한 방군수포(放軍收布)의 관행은 수군에서도 성행하여 해안 방어가 허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임진왜란 이후 수군에 대한 제도적 정비가 시행되었으나 수군의 근무 여건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수군역은 대표적인 고역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 관련자료

ㆍ기선군(騎船軍)
ㆍ수군(水軍)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