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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제목 왜관
한자명 倭館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조선이 일본의 여러 세력들과 무역 문제 등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했던 곳으로 숙박과 접대의 기능도 함께 담당함.

[내용]

조선은 왜구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의 여러 세력들과 교류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의 무역 행위를 허용했다. 왜관은 일본인이 조선과 무역을 하던 곳이면서 동시에 일본인들에 대한 접대와 숙박의 기능을 담당했던 곳이다. 일본인들의 상경이 허락되지 않았을 경우 무역 절차와 외교 의례 등이 모두 왜관에서 시행되었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은 1407년(태종 7) 부산포(富山浦)와 내이포(乃而浦)를 개항해 무역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후 1418년(태종 18) 염포(鹽浦)와 가배량(加背梁)을 개항했다. 하지만 조선이 의도했던 것보다 무역에 참여하려는 일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개항장을 중심으로 왜관을 설치해 교역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또한 일본인들에 대한 접대와 숙박의 기능도 담당하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1419년(세종 1) 조선에서 대군을 동원해 쓰시마 섬 정벌을 단행한 뒤 개항장은 모두 폐쇄되었다. 조선과의 무역 활동이 중요했던 쓰시마 섬(對馬島)에서는 정벌 이후 지속적으로 개항을 요청했고, 결국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1423년(세종 5)과 1426년에 다시 3포를 개항했다. 왜관은 개항 때에 설치되었다가 항구가 폐쇄될 때 함께 폐지되었다. 1510년(중종 5) 3포 왜란(三浦倭亂)과 1544년(중종 39) 사량진 왜변(蛇梁鎭倭變) 때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1603년(선조 36)에는 임진왜란 이후 정권이 교체되었던 일본 측의 요청에 따라 왜관에서 무역 시장이 개설되기도 했다. 이를 왜관 개시(倭館開市)라고 불렀다. 교역과 시장이 규모가 커지면서 왜관개시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적 사무역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를 왜관 후시(倭館後市)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무역의 형태는 조정에서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밀무역의 형태로 교역이 진행되는 경우도 많았다.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대표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이 맺어질 때까지 양국 무역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인들의 상업 활동 지역에 제한이 없어지는 동시에 부산⋅원산⋅인천이 개항되면서 왜관은 기능을 상실하고 폐쇄되었다.

▶ 관련자료

ㆍ왜관(倭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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