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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영

제목 5군영
한자명 五軍營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5군문(五軍門), 5영(五營), 5영문(五營門), 오군문(五軍門)
별칭•이칭

[정의]

양란 이후 수도와 그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립한 다섯 개의 군영.

[내용]

1. 5군영의 창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조선은 서울을 방어를 위해 이전의 5위제(五衛制)를 개편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기존의 5위 체제로는 서울을 제대로 방어할 수 없다는 위기감 속에서 새로운 군영을 창설했다. 가장 먼저 임진왜란을 계기로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이후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금위영(禁衛營)을 시간 차를 두고서 설치하였다. 이 가운데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수도 수비와 궁궐 경비까지 담당하였다. 그리고 총융청과 수어청은 수도의 외곽을 수비하였다.

2. 5군영의 운영

훈련도감이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1623년(인조 1)에 어영청, 1624년(인조 2)에 총융청, 1626년(인조 4)에 수어청, 1682년(숙종 8)에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5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 가운데 서울의 수비와 궁궐과 도성의 경비 등의 업무를 맡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삼군문(三軍門)이라고 하였다. 도감의 군사들은 기본적으로 급료병이었다. 반면 어영청, 금위영의 경제적 기반은 정부에서 배정한 보인(保人)이었으며, 번상(番上)하여 서울과 근교의 군문에 근무했다. 이들이 번상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이들에게 지급되는 월료(月料) 때문에 국가는 재정적인 곤란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흉년이 들었을 때처럼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에는 상설 군영의 성격인 훈련도감을 제외하고는 번상을 중지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유동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5군영은 서울과 궁궐 그리고 서울 외곽의 방어를 맡으며 개화 시책으로 1881년(고종 18)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으로 재편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 관련자료

ㆍ5군영(五軍營)
ㆍ5군영제(五軍營制)
ㆍ5영(五營)
ㆍ오군영(五軍營)
ㆍ오영(五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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