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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 증식 계획

제목 산미 증식 계획
한자명 産米增殖計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일제가 쌀을 조선에서 안정적으로 생산하여 일본으로 공급하기 위해 1920년부터 실시한 농업 정책.

[내용]

산미 증식 계획은 1920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제1기는 1920~1925년에 실시된 산미 증식 계획, 제2기는 1926~1934년에 실시된 산미 증식 갱신 계획, 제3기는 1940년부터 실시된 조선 증미 계획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 자본주의는 급속히 발전했지만 물가가 폭등하여 일반 대중의 실질 임금이 급격히 떨어졌다. 더구나 1918년에는 미가(米價) 폭등에 따른 대규모의 쌀 폭동(쌀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1890년대 이후 만성적인 쌀 수입국이었던 일본에서 저가의 식량을 공급하는 문제는 큰 사회 문제가 되었다. 1910년대부터 조선을 식량 공급 기지로 재편하려던 일제는 조선 쌀을 증산하여 일본에 안정적으로 공급한다는 목적에서 산미 증식 계획(이하 ‘계획’)을 실시했다.

계획은 토지 개량 사업과 농사 개량 사업으로 구분된다. 토지 개량 사업은 30년 동안 논 40만 정보를 관개하고, 밭 20만 정보를 논으로 바꾸며, 20만 정보의 토지를 개간해 경작지를 확대하는 등 총 80만 정보의 토지 개량이 목표치였다. 특히 총독부는 관개 개선 사업으로 수리 조합 사업에 주력했다. 한편 농사 개량 사업의 핵심은 일본식 개량 농법 보급이었다. 품종 개량과 비료 증가를 통해 수확량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제1기 계획은 15년 동안 42만 7,000정보의 토지⋅농사 개량을 하여 약 900만 석의 쌀을 증수하여 460만 석을 일본으로 반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5년까지 실적은 5년간 착수 예정 면적의 59%인 9만 7,500정보에 불과했고, 농사 개량도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실제 수확도 당초 예상에 훨씬 못 미쳤다. 그 원인은 경제 불황으로 사업 자금 조달에 실패했고, 지주들이 토지 개량보다 이윤이 큰 토지 구입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제는 계획을 수정하여 1926년부터 12년 예정으로 정부 알선 자금 비중을 높이고 계획 추진 행정 기구를 강화하는 등 제2기 갱신 계획을 추진했다. 제2기 실적은 1기보다 양호했다. 그러나 1930년 농업 공황으로 미가가 폭락하여 일본 농촌의 위기가 고조되자 일본 내에서 조선 쌀의 일본 유입을 반대하는 등 한계에 봉착하였고 이에 일제는 1934년 계획을 중단했다. 토지 개량 성과는 예정 면적의 69%인 15만 4,100정보, 농사 개량 자금의 융통 실적은 예정액의 72%인 7만 9,316원이었다.

중단된 정책이 다시 시작된 것은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전시 식량 확보가 중요시되고, 1939년 대가뭄으로 인한 식량 위기가 발생한 뒤부터였다. 1940년 조선 총독부는 6년 예정으로 조선 증미 계획을 수립했다가 이듬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계획을 확충하여 개정 증미 계획을 시행했다. 이때의 계획은 경종법(耕種法) 등 농사 개량 사업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전시 체제 아래에 노동력과 자금 부족으로 의도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

계획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쌀 위주의 식민지 농업 생산 체제가 강화됨으로써 한국의 농업생산 체제가 왜곡되었다. 둘째, 쌀 생산은 증가했지만 그 이상으로 일본으로의 반출이 늘어남으로써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오히려 감소했다. 1930년 쌀 생산량은 10년 전인 1920년에 비해 약 250만 석이 증가한 반면, 같은 기간 반출량은 약 430만 석이 늘었다. 당시 반출량은 500~900만 석 규모로, 일본 내 소비량의 10%에 달하는 규모였다. 또 1인당 쌀 소비량은 1912년 0.77석에서 1926년 0.53석, 1936년에는 0.38석으로 급감했다. 이에 따른 쌀 부족분은 만주에서의 잡곡과 베트남 쌀 등으로 충당되었지만, 식량의 절대소비량은 감소했다. 때문에 한국인 상당수의 생활 수준은 더욱 어려워져 갔고,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셋째, 계획의 중심 사업인 수리 조합의 경우 중소지주와 자작농 층은 조합비를 견디지 못하고 토지를 상실한 반면,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들은 토지를 집적함으로써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했다. 특히 일본인이 주도한 수리 조합 구역에서 조선인 자작농과 중소지주의 몰락이 심했다. 넷째, 지주들이 소작농에 부과하는 소작료와 각종 부담이 증가하여 다수의 소작 농민들이 빈곤에 시달렸다. 산미 증식 계획은 일제의 식민농정에 적극 협력하였던 일본인 지주 및 한국인 대지주, 소수 중소지주에게는 성장의 기회였지만, 대부분 한국 농민들에게는 몰락과 빈곤을 가져왔다. 이로써 일본인 대지주와 한인 중소지주의 민족 갈등, 지주와 농민의 계급 갈등이 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관련자료

ㆍ산미 증식 계획(産米增殖計劃)
ㆍ산미 증식의 계획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