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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제목 만주국
한자명 滿洲國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일본,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일제가 만주 사변 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세운 꼭두각시 괴뢰 국가.

[내용]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만주 사변(중국에서는 ‘9⋅18 사변’이라 부른다)을 일으켰다. 이후 관동군은 1932년 1월 진저우(錦州)를 확보하고 2월 하얼빈을 점령함으로써 둥베이 지역을 제압했다. 관동군은 침략 직후부터 만주를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시켜 독립 국가를 수립한 뒤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할 것을 방침으로 정했다. 이에 관동군은 중국의 제소를 받고 파견한 국제 연맹의 리튼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인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수립을 강행했다.

만주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 1906~1967)가 집정이 되었는데, 관동군은 둥베이 지방이 만주족의 옛 땅인데다 옛 황제로서의 명망을 이용하기 위해 푸이를 앞세웠다. 수도를 신징(新京)에 두었고, 연호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만주국을 승인한 나라는 독일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등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후 관동군은 러허 작전(熱河作戰)을 통해 중국 화베이(華北) 지방 일부를 점령했고, 이로써 만주국의 영토는 현재 중국을 기준으로 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동북3성) 및 내몽골 동부와 허베이성(河北省) 북부를 포괄하게 되었다. 1934년 만주국은 국명을 ‘대만주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변경했다. 푸이는 집정에서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만주국의 실권은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만주국은 괴뢰 국가, 보호 국가라는 국제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현지 중국인들에 의해 정치 결정이 이뤄지는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인사와 재정, 자원 등 제반 행정을 관장한 총무원에는 일본인 관리가 중심이 되었고, 이 과정을 관동군이 이면에서 통제하였는데 이를 ‘내면지도’라 불렀다.

한편 만주국은 일본제국의 실험장이 되었다. 만주국에서 일제는 일본인이 언어, 문화가 다른 이민족과 공존하는 다민족사회 형성을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만주국에서는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이념이 표방되었다. 또한 전쟁을 통해 탄생한 만주국은 서구에 대항하여 일제의 자급자족적 경제권을 만드는 데 핵심 공간이 되는 등 일본의 총동원 체제 형성에 필수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족협화는 일본인의 자민족중심주의 아래서 허울뿐인 것이었고, 민족적 차별은 여전하였다. 또한 일제의 총동원 체제는 다른 민족에게 일본을 위한 침략 전쟁에 협조를 강요하거나 강제로 동원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출병하여 만주국의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8월 18일에는 황제 푸이가 퇴위조서를 반포하면서 만주국은 멸망했다. 중화민국(현재 타이완)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만주국에 대한 합법성 및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위만주국(僞滿洲國)’ 또는 ‘위만(僞滿)’으로 칭하였다.

▶ 관련자료

ㆍ만주국(滿洲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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