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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

제목 삼전도
한자명 三田渡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청(靑)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조선 시대 한강과 탄천이 합류하는 한강 상류 지역인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소재했던 나루터.

[내용]

삼전도는 조선 시대 마전도(麻田渡)라고도 불렀으며 나루터 주변에 삼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전도라는 지명은 삼밭 나루를 한자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삼’이라는 소리를 음차(音借)한 것이다. 1439년(세종 21) 설치된 삼전도 나루터는 서울과 경기도의 여주⋅이천 일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물길은 전통 시대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했고, 한강은 물자가 서울로 진입하는 중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표적인 나루터인 삼전도는 많은 사람과 물자가 집결되는 곳이었다.

삼전도는 특히 한양의 궁궐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에 도착하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 정부는 장기적인 항전에 대비하고자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지만, 가는 길이 끊겨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와 대신들은 45일 만에 청나라에 항복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식을 행하였다. 삼전도는 인조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면서 굴욕적인 패배를 인정했던 장소였다. 그리고 청나라의 강요로 병자호란의 패배를 인정하고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를 삼전도에 세웠다. 이후 삼전도는 청나라 사신들이 꼭 시간을 내어 들르는 장소가 되었다.

삼전도는 남한강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이나 경상도에서 과거 시험을 위해 서울로 오는 사람들도 꼭 거쳐갈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조선 후기 많은 지식인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던 것은 이곳이 육로에서나 수로에서나 쉽게 보이는 장소였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1895년(고종 32) 고종은 패배와 굴욕의 상징인 삼전도비를 한강 주변에 매립했다. 일제 때 다시 세워진 삼전도비는 해방 후 다시 매립되었고, 이후 땅 위로 다시 드러나자 석촌호수 연안에 다시 세웠다.

▶ 관련자료

ㆍ삼전도(三田渡)
ㆍ삼전도비(三田渡碑)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