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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싸움(민족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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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싸움(민족기록화)은 645년(보장왕 4년) 고구려가 당나라 군대와 안시성(安市城)에서 벌인 공방전을 그린 기록화이다.

안시성 싸움의 과정을 보면, 644년 당 태종(唐 太宗, 재위 626~649)은 상당한 반대 여론에도 고구려 침공을 결심한다. 645년 4월 1일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당의 선봉은 회원진(懷遠鎭) 쪽으로 진군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통정진(通定鎭)에서 요하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고구려의 방어체계를 혼란시키기 위해 신성(新城)⋅건안성(建安城) 등 여러 성을 동시에 공격했으나, 이 계획이 실패하자 전군을 집결시켜 개모성(蓋牟城)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이때 장량(張亮)이 지휘하는 수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천연의 요새임을 자랑하던 비사성(卑沙城)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태종도 요하를 건너와 이세적의 군대와 합류하여 집요한 공격 끝에 요동성(遼東城)을 함락하고, 이어서 백암성(白巖城)을 빼앗았다. 백암성 함락 후 당군은 이견을 조정하여 다음 공격목표를 안시성으로 정하고, 안시성으로 쳐들어갔다. 고구려에서는 이에 맞서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南部褥薩) 고혜진(高惠眞)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말갈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군을 가볍게 보고 성급하게 정면대결을 벌이다가 당군의 포위공격을 당했으며, 결국 항복하였다.

안시성의 위기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당은 고연수 등을 앞세워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당시 가장 위력적인 성 공격무기였던 포거(抛車)와 충거(衝車)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안시성 측은 이를 번번이 물리쳤고, 무너진 성벽도 재빨리 수리하는 등 확고한 자세로 방어에 임하였다.

당은 토성을 탈환하기 위해 3일간 극렬한 공격을 폈으나 실패했으며, 그 결과 당의 작전은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겨울이 되어 날씨도 추워지고 군량마저 떨어졌으므로, 당은 할 수 없이 포위를 풀고 서둘러 퇴각하였다. 이러한 전공을 기록화로 남긴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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