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삼국 시대백제의 건국과 성장

황산벌 싸움(민족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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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싸움(민족기록화)은 백제의 계백(階伯)과 5,000명의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에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한 싸움을 그린 민족 기록화이다. 오승우(吳承雨)가 그렸으며, 국가공훈선양회(월간보훈문화)에서 편찬한 『민족기록화로 본 한국역사』에 실려 있다. 『민족기록화로 본 한국역사』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증을 바탕으로 전문 화가들이 한국 역사의 중요 장면을 그린 37편의 민족기록화를 수록한 책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충청남도 논산의 백제군사박물관 제2 전시실에 전시된 백제 장군과 사병의 실물 크기 모형으로, 당시 계백 장군과 병사들의 복식, 무기, 전투 방식 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백제군사박물관에는 이외에도 성곽전투재현 모형, 전법과 전술, 각종 문헌에 나타난 백제 관련 기록 등을 전시하고 있어 당시 백제의 방어 체계와 군사 활동에 대하여 상세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황산벌 싸움의 과정을 보면, 백제는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 초기에 왕권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 후 중국과 신라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연결해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642년(의자왕 2년)에 대야성(大耶城)을 비롯한 신라 남부의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를 당나라에 파견해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벌인 결과,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년, 백제 의자왕 20년)에 이 나당연합군이 드디어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라이저우[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과 흠춘(欽春)⋅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의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하였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 쳐서 예봉을 꺾은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하였으며,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는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白江)을 지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탄현(炭峴)을 막아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해 양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반면에 대신들은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백제 조정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은 7월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했으며, 탄현을 지키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였으며,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이 싸움의 패배로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백제인 13,000명을 잡아감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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