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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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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령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眞興王 巡狩碑)는 신라 진흥왕이 568년(진흥왕 29년) 황초령에 건립한 순수비이다.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가장 먼저 알려졌으며, 19세기 초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위 부분과 왼쪽 아래 부분이 일부 마멸되었는데(광복 후 마멸된 부분이 발견), 현재 남아 있는 비는 비문이 모두 12행이고 행마다 35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황초령비는 현재의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 진흥리에서 발견되었는데, 1852년(철종 3년)에 당시 함경도관찰사 윤정현(尹定鉉)이 비를 보호하기 위해 황초령 정상의 원 위치에서 고개 남쪽인 중령진(中嶺鎭) 부근, 즉 하기천면 진흥리로 옮겨 비각(碑閣)을 세운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은 이 비와 마운령비가 실제로 신라의 동북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즉, 신라 때의 동북 경계를 안변의 남대천(南大川) 유역으로 보고, 어쩌면 황초령비는 그 부근인 철령에 세웠을 터인데 고려 예종윤관(尹瓘, ?~1111)이 함흥평야의 여진족을 정복한 뒤 9성을 쌓을 때 그 점령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철령에 있던 비석을 함흥평야의 북쪽 경계 요충지에 해당하는 황초령으로 옮겼다고 주장하는 등 이견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같은 시기에 세워진 「마운령비(摩雲嶺)」와 거의 일치하는데, 유교적인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지향하려는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역수(曆數)의 관념을 비롯해 건원(建元)⋅짐(朕)⋅순수(巡狩)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에서 제왕(帝王)으로서의 자부심이 나타나 있다. 비석의 위치와 비문 상의 지명⋅순수에 수행한 신료들의 이름⋅관직은 당시 신라의 영역과 관등⋅관직의 정치 제도, 지명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되고 있으며, 서체와 이두문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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