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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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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영정은 이규선(李奎鮮)이 그린 최치원(857~?)의 국가표준영정이다. 1981년에 제작되었고, 1983년에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치원은 통일신라의 대학자이자 문장가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857년(헌안왕 1년) 경주 사량부(沙梁部)에서 태어났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원찰(願刹)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참여했던 최견일(崔肩逸)이다.

최치원은 868년(경문왕 8년) 12세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874년(경문왕 14년) 7년 만에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지만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 양양(襄陽) 이위(李藯)의 문객(門客), 관역순관(館驛巡官)을 역임하였으며, 879년(신라 헌강왕 5년, 당 희종 6년) 황소(黃巢, ?~884)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최치원은 당에 머무는 17년 동안 나은(羅隱, 833~909)과 같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이름을 떨쳤다.

885년(헌강왕 11년) 신라로 귀국한 최치원은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 兼 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에 임명되면서 당에서 배운 경륜을 펼치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귀족의 반대에서 오는 6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에 회의를 느끼고 외직으로 물러났다.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때 공부(貢賦) 납부 독촉으로 인한 전국적인 민란이 일어나자, 그는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렸다. 진성여왕이 이를 받아 들여 6두품으로서 최고 관등인 아찬(阿湌)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 개혁안은 골품제도의 모순에 직면하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에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감을 느낀 그는 관직을 버리고 은거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023년(고려 현종 14년)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최치원은 유학자였지만, 불교, 노장사상, 풍수지리설까지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지은 저서로도 표현된다. 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등이 있으며, 불교에 관계된 저술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1권,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1권과 『석이정전(釋利貞傳)』⋅『석순응전(釋順應傳)』⋅『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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