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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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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상(王建像)은 1992년 북한당국에서 개성시(開城市) 개풍군(開豊郡) 해선리(海仙里)에 위치한 왕건릉(王建陵) 확장공사를 하던 중 지하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비단 조각 및 도금한 청동 조각과 함께 출토된 왕건상은 출토 과정에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떨어지고, 여러 곳이 찌그러지는 등의 손상을 입었지만, 현재 복원된 상태이다. 함께 출토된 비단 조각 및 도금한 청동 조각은 당시 복원과정에서 소실되었다. 현재 얼굴과 귀 등에 살구색 안료(顔料)가 남아 있어 채색까지 마친 온전한 동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건상의 크기는 실제 성인 남성과 같게 제작되었으며, 머리에 쓰고 있는 관(冠)은 중국의 황제가 쓰던 통천관(通天冠)으로 고려왕조가 황제국을 표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몸통은 나체로 남아 있지만, 발견 당시 함께 출토된 화려한 옥대(玉帶)와 각종 비단천 조각 등을 통해 왕건상이 착용하고 있던 복식도 황제의 복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건상이 발견되었을 때 북한 고려박물관에서는 금동불상(金銅佛像)으로 추정했지만, 문헌조사 결과 청년기의 왕건상으로 확인되었다. 왕건상은 951년 제작되어 개성 봉은사(奉恩寺) 태조진전(太祖眞殿)에 봉안되었으며 고려 전시기에 걸쳐 국가의례 때마다 숭배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주자학적 제례법(祭禮法)을 따르려는 세종의 의도에 따라 세종 11년에 개성 왕건릉인 현릉(顯陵)에 묻혔다.

왕건(王建, 877~943, 재위 918~943)은 고려의 초대 왕으로 송악(松嶽)에서 태어났다. 후삼국 중 후고구려의 왕인 궁예의 신하가 된 왕건은 전쟁 때마다 공을 세워 신임을 얻어 시중(侍中)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왕건은 점차 세력이 강대해졌고, 918년 6월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어가자, 홍유(洪儒, ?~936), 배현경(裵玄慶, ?~936), 신숭겸(申崇謙, ?~927)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였고,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기고 융화정책, 북진정책,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펼쳤다. 지방호족들을 회유, 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 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 합병을 이루고, 이듬해 앞서 항복해 온 견훤(甄萱, 867~936)과 함께 신검(神劍, ?~936)의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켜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건상은 조상제례에 옷을 입히는 조각상을 사용하는 한국 고대 이래의 문화전통이 고려에서도 계승되었음을 알려주며, 특히 고려가 황제국을 지향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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