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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터의 용머리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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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터의 용머리 조각 장식[壽昌宮 龍頭]은 수창궁의 정문 앞에 위치하여 있었으나 현재는 고려박물관 앞뜰에 옮겨져 있다. 고려박물관 앞뜰에 위치한 개성 성균관 대성전 앞으로 용의 수컷인 수창궁 용머리 조각과 용의 암컷인 만월대 회경전 출토 용머리 조각이 한 쌍으로 나란히 묻혀있다.

용머리 조각은 머리 부분만 생동감 있게 조각하여 몸체 부분은 구름 또는 물속에 깊숙이 묻혀 있는 듯 한 용의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입을 앞으로 내밀어 쩍 벌려 드러난 이빨로 보주를 물고 있다. 입술은 아래⋅위로 말려 더욱 생동감을 더했으며, 입 안의 혀도 두툼하게 표현하였다. 입 주변으로 눈과 주름을 세밀하게 조각하였으며, 머리 뒤쪽으로 비늘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수창궁은 고려 초기에 축조된 별궁으로 도성의 서소문 안에 있었다고 한다.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침입으로 만월대의 정궁(正宮)이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수창궁은 피해를 입지 않아 청주로 피난갔던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돌아와 이곳에 기거하였다. 이후 1106년(예종 1년) 수창궁에서 이상한 일이 자주 발생하자 고려 왕실은 명복궁(明福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1187년(명종 17년) 정월 추밀원의 화재로 수창궁의 행랑 기둥 20여 개가 소실되었고, 8월에는 1171년(명종 1년) 10월 화재 이후 머물었던 수창궁을 떠나 연경궁(延慶宮)으로 옮겼으며, 1196년(명종 26년) 4월에는 수창궁 중서성문이 무너졌다. 이후 1213년(강종 2년) 8월 왕이 수창궁 화평전(和平殿)에서 세상을 떠나는 일도 있었다. 1234년(고종 21년) 11월 태조 왕건신어(神御)를 수창궁에 봉안하였다. 이러한 수창궁은 몽골과의 전쟁을 통해 많이 훼손되었고, 1297년(충렬왕 23년) 윤12월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이 자신과 결혼할 원나라 공주 보탑실령(寶塔實怜)이 거처할 궁려(穹廬)를 짓기 위해 수창궁을 보수하였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연경궁이 소실되어 이곳으로 다시 이동하였고, 1370년(공민왕 19년)에 다시 수창궁을 수축하게 하여 1381년(우왕 7년) 수창궁조성도감(壽昌宮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최영(崔瑩, 1316~1388)⋅이성림(李成林, ?~1391) 등에게 공사를 계속 담당하게 하여 1384년(우왕 10년)에 완성하였다.

1388년(창왕 1년) 잠깐 수녕궁(壽寧宮)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뒤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과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정종은 한양 경복궁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머물렀고, 1400년(조선 정종 2년) 11월 정종의 왕위를 이어받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은 수창궁에서 즉위하여 다시 한양의 경복궁으로 옮긴 뒤, 창덕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수창궁 용머리 조각은 전체적으로 힘차고 강인한 느낌을 주며 만월대(滿月臺) 회경전에 출토된 용머리 조각과 함께 고려시대 석조물의 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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