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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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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성균관(開城 成均館) 건물은 원래는 고려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의 별궁(別宮)인 대명궁이었다. 이후 외국사신의 숙소인 순천관(順天館), 유교 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숭문전(崇文殿)으로도 사용되다가 1089년(선종 6년)에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992년(성종 11년) 설치된 국자감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1304년(충렬왕 30년) 국학(國學)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1310년(충선왕 2년)에 들어 성균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소실되었던 것을 1602년(조선 선조 35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 고려박물관의 전시동으로 이용하고 있다.

성균관은 약 1만㎡의 넓은 부지에 18동의 건물이 남북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講學)구역이 앞쪽으로,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배향(配享) 구역을 뒤쪽으로 배치하였고, 내삼문(內三門)이 있는 담상으로 구분된다.

홍살문 형태의 외삼문 앞으로 명륜당(明倫堂)이 있으며,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향실과 존경각(尊經閣)이 있고, 그 앞쪽 좌우에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초익공계 맞배지붕을 사용하여 축조되었으며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으로 마감하고 모로단청(毛老丹靑)으로 장식하였다. 향실과 존경각은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로, 향실은 민도리계 맞배지붕이나 존경각은 팔작지붕으로 만들어 졌다.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9칸, 측면 3칸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명륜당 북쪽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내삼문을 들어가면 그 앞에 대성전이 있고, 그 앞뜰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공자를 위한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초익공계 팔작지붕집이다. 명륜당과 같이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으로 하고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던 동무와 서무는 각각 정면 1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을 올려 건물을 축조하였다. 이외에도 10여 채의 부속건물들이 더 있다.

개성 성균관은 유교적 질서에 따라 남북축을 따라 중심 부분을 대칭으로 구성함과 동시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박하게 지어졌다. 고려 말기에 이색(李穡, 1328~1396)이 대사성을 맡고,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조선 전기 한양에 성균관이 지어지면서 개성성균관은 향교로 그 위치가 낮아졌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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