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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경애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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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경애 묘지명(廉瓊愛 墓誌銘)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최누백(崔婁伯)이 첫 부인 염경애(廉瓊愛, 1100~1146)의 죽음을 위로하고자 1148년(의종 2년)에 직접 적은 묘지명이다. 수원 향리의 아들로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오른 최누백은 의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승진하고, 국정에 관한 왕의 자문에 응했으며, 1158년(의종 12년)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승보시(升補試 : 生員試)를 맡아 보았고,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

묘지명은 네모난 오석을 사용하여 제작하였으며, 가로 70.3㎝, 세로 33㎝, 두께 33㎝이다. 앞면에는 용맹스런 백호의 모습을 음각하고 있으며, 뒷면에는 정간으로 구획하여 묘지명의 내용을 빼곡하게 새겨 넣었다.

염경애 묘지명의 내용은 그의 남편 최누백이 지은 만큼 가난한 하급 관료 시절, 가정의 위해 동분서주하던 아내와의 대화를 추억하는 내용, 그녀를 잊을 수 없어 애통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또한 죽은 시아버지의 제사를 공경히 모셨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와 달리,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 묘지명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물론 조선시대와 동일하게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대한 부분은 일정한 제약이 따랐지만, 가정생활이나 가정경제에 있어서는 남성과 대등한 위치에 있어 부모의 유산을 균등하게 상속받았고, 호적에도 남녀의 구분 없이 나이순으로 기재되었으며, 여성의 재가가 비교적 자유로웠다. 염경애 묘지명은 이러한 고려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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