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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 대각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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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 대각국사비(靈通寺 大覺國師碑)는 개성시 용흥리 오관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영통사에 있는 비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32~1083)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이 비는 의천이 입적한 1125년(인종 3)에 세워졌다.

비석의 크기는 전체 높이 4.32m이며, 비신 높이 2.9m, 너비 1.56m, 두께 24㎝이다. 비석은 귀부(龜趺)⋅비신⋅옥개석(玉蓋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귀부는 화강석, 옥개석과 몸체는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귀부는 낮고 둔중한 편으로 용의 머리에 거북의 몸을 하고 있으며, 등에 낮은 비석 받침[碑座]이 있다. 비신의 앞면 상단에는 ‘증시대각국사비명(贈諡大覺國師碑銘)’이라는 전액이 기록되어 있다. 그 좌우로 봉황과 보상화문을 양각하였으며 비면의 가장자리에도 보상화문대를 장식하였다. 옥개석의 처마에는 네모진 서까래를 모각하였다. 비문에는 의천이 어린 시절 출가한 뒤 송에 유학을 떠나 천태종과 화엄종을 배워 귀국하였고, 이후 해동 천태종을 개창한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비의 뒷면인 음기(陰記)부분에는 대각국사의 묘실과 비명에 대한 사적기와 문도들의 이름⋅직명이 기록되어 있다.

대각국사 의천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의 넷째 아들로 11세 때 출가하여 경(經)⋅율(律)⋅논(論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이후 송나라에 가서 유학한 뒤, 많은 불교서적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후 흥왕사(興王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한 뒤『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을 간행하였다. 1097년(숙종 2년)에는 국청사(國淸寺)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1099년 천태종의 제1회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시행함에 따라 국가가 공인하는 종파로 성립되었다. 의천은 천태종의 근본 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였던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지었고 글씨는 오언후(吳彦侯)가 구양순체의 해서로 썼으며, 음기는 문하승 영근(英僅)과 혜소(慧素)가 해서로 쓴 것이다. 오언후의 글씨는 고려전기 유행하던 구양순체 해서체 중에서도 최고였으며 혜소의 글씨 또한 절정기에 이르렀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영통사 대각국사비는 비문의 내용과 글씨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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