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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려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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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려궁터(江華 高麗宮址)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년)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몽고의 제2차 침입으로 또다시 위협이 가해지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개성의 궁궐을 본떠 왕궁과 성⋅관아시설을 축조하게 하였으며, 왕궁 뒤의 야산을 개성의 송악산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1232년(고종 19년) 2월 공사가 시작되어, 2년 후인 1234년(고종 21년) 궁궐에 대한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고려 궁정의 건물로는 본궁인 연경궁(延慶宮), 그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康安殿), 소동문을 들어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景靈宮),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乾德殿), 그 동쪽에 장녕전(長寧殿), 뒤쪽에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太廟殿閣)으로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다. 만월대와 같이 정문은 승평문이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다. 또한 동쪽에는 광화문이 있었다. 이후 1251년(고종 38년) 국자감이 설치되고 1255년(고종 42년) 태묘가 세워지면서 점차 수도다운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39년 동안 왕궁터로 사용되다가 1270년(원종 11) 몽골과 화의를 맺고 개성(開城)으로 환도하게 되었고, 몽고군의 요구로 내성과 외성은 모두 헐어버렸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해지면서 궁성의 일부를 축소하여 재축성하였으나, 1637년(인조 15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이후 1677년(숙종 3년) 강화 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에 의해 개축되면서 고려시대 내성의 크기로 석성을 쌓았다. 1709년 강화 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하였고, 1711년(숙종 37년) 강화 유수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 서문인 첨화루(瞻華樓)를 세웠고, 1783년 개축 당시 원래 문루가 없던 북문 진송루(鎭松樓)를 세우는 등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성안에는 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와 여장 등 다양한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4개의 암문(暗門)과 2개의 수문(水門)이 있다. 1966년 서문이 해체, 복원되었고, 1974년 남문 문루가 복원되었으며 이듬해에 성곽이 보수되었고, 1977년 북문이 복원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행궁과 강화 유수부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당시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했던 외규장각도 있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의 방화로 소실되고 많은 서적을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외규장각 건물은 1995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2003년에 건물을 복원하였다.

강화 고려궁터는 외침에 줄기차게 저항했던 민족의 저력이 흐르는 국난 극복의 역사적 현장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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