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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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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處仁城 戰鬪)는 1232년 12월 경기도 용인시 처인성에서 처인부곡민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이다. 1231년(고종 18년)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고려 정부는 몽고군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년) 6~7월 강화도로 천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몽고군은 기존의 화약 파기에 대한 책임으로 10월 2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함락하고 즉각적으로 남진하여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광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이세화(李世華)장군이 지휘 하에 광주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광주성 함락에 실패하게 된다. 몽고군은 광주성 공략을 포기하고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규모가 작았던 처인성을 상대로 전면전을 준비하였다.

처인성은 당시 승장 김윤후(金允侯)와 몽고군의 침탈을 피해 주변의 많은 백성들이 모여 있었다. 1232년(고종 19년) 몽고의 장군 살리타[撤禮塔]가 처인성에 침입하였고, 김윤후 장군은 격전 끝에 활을 쏘아 살리타를 사살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살리타의 죽음으로 지휘체계의 혼란과 개별 부대의 약탈이 자행되면서 몽고군은 철군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몽고의 2차 침입이 실패로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인성의 승리로 승장 김윤후는 살리타를 사살한 전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을 제수(除受)받았으나 벼슬을 사양하자, 섭랑장(攝郎將)에 임명되었다. 이후 충주산성(忠州山城) 방호별감(防護別監)되었으며, 몽고가 3차 침입한 1253년(고종 40년) 몽고군이 처인성을 포위하고 70여 일간 공격하였을 때, 김윤휴는 다시 병사와 군민(軍民)이 독려하여 일치단결하여 몽고군을 격퇴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그 공으로 김윤후는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 되었다. 또한 처인성이 위치한 처인부곡(處仁部曲)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고 같이 군공을 세운 관노와 일반 백성도 모두 관작이 제수되었다.

처인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갑작스런 천도와 여러 지역에서의 민란 등으로 극히 취약해진 최씨 무인 정권에게 강력한 반몽책을 견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아울러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위적인 항전이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때의 의병 운동의 원류로 인식되기도 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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