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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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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묘지명(崔忠獻 墓誌銘)은 무신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 사망한 직후인 1219년(고종 6년)에 제작된 묘지명이다.

묘지명은 네모난 오석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뒷면에는 정간으로 구획하여 묘지명의 내용을 빼곡하게 새겨 넣었다. 당시 보문각대학사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상장군 판예부사(寶文閣大學士 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尙書左僕射 政堂文學 上將軍 判禮部事)였던 조충(趙沖, 1171~1220)이 지었다.

묘지명의 내용은 최충헌의 가계와 출생, 관직진출과정, 이후 관직수여와 왕의 보필, 사망과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죽은 자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묘지명의 특성상 최충헌에 대한 내용 또한 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은 1196(명종 26년)년 최충수(崔忠粹, ?~1197)와 박진재(朴晉材, ?~1207)와 함께 이의민을 제거하여 무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그는 명종(明宗, 재위 1170~1197)에게 집권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봉사십조』를 올렸다. 그러나 명종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명종을 유폐하고, 그의 동생 평량공 민(平凉公 旼 : 神宗)을 왕으로 추대하여 최씨 무신 정권을 완성하였다.

정권을 확립한 이후에도 1198년(신종 1년) 만적의 난과 같은 그를 처치하려는 사건이 지속으로 발생하자 그는 경대승(慶大升, 1154~1183)이 설치했던 도방(都房)을 다시 설치하여 자신의 사병으로 삼아 신변을 보호하였다. 1209년(희종 5년)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인사⋅감찰⋅징세(徵稅) 등 국정 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최씨 정권의 최고기관으로 존속하였으며, 그는 스스로 그 장(長)인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이규보(李奎報, 1168~1241)를 등용하여 무신 정권으로 쇠퇴했던 문운(文運)의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1219년(고종 6년) 7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최충헌은 정권을 잡았던 당시 신종(神宗, 1197~1204)희종(熙宗, 1204~1211)강종(康宗, 1211~1213)고종(高宗, 1213~1259)의 네 임금을 왕위에 세우고 명종희종은 폐위시키는 등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였다. 또한 그는 정권을 장악하는 동안 자신의 직위를 승격시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여 최씨 무신 정권의 운영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의 사후 아들 최이(崔怡, ?~1249)가 정권을 이어받아 최씨 무신 정권을 이어나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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