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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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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초상(李穡 肖像)은 고려 말 문신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전신을 그린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과 평상복 두 가지의 복장을 한 모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관복차림의 그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은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은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하는데 크기가 가로 85.2cm, 세로 143cm이다. 여기에서 이색은 관리가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사모에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준 것과 얼굴을 붉게 한 것에서 당시의 화법을 엿볼 수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당대 일류화가들이 그렸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서울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사방이 잘려나가 본래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아 현재 반신상으로 남아있지만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골격과 안면처리가 섬세하여 회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그림이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의 그림인데 1711년에 옮겨 그린 것이며 현재 임강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가로 85.2㎝, 세로 150.7㎝인데 목은영당본과 같은 형식이며 1755년에 옮겨 그린 것이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1844년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를 보이는데 화가의 솜씨가 뛰어나 옛 그림의 화풍이 잘 표현되었다.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야은 길재(冶隱 吉再)와 더불어 고려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이다. 1348년(충목왕 4년)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2년(공민왕 1년)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사항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여 1354년(공민왕 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고,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과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공민왕 5년) 귀국한 이색은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면서 인사행정을 주관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임명되면서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7년(공민왕 16년) 대사성이 된 이색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였고 김구용(金九容, 1338~1384)⋅정몽주(鄭夢周, 1337~1392)⋅이숭인(李崇仁, 1347~1392) 등과 함께 성리학의 보급 및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1377년(우왕 3년) 우왕(禑王, 재위 1374~1388)의 요청으로 우왕의 사부가 되었으나, 1389년(공양왕 1년)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 ?~1390)와 함께 창왕(昌王, 재위 1388~1389)을 옹립하였다. 1392년(조선 태조 1년) 정몽주이성계(李成桂, 1335~1408) 일파에 의해 피살되고 이색은 금주(衿州)⋅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되었다. 1395년(태조 4년)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가 출사를 종용하였지만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색의 글은 『목은시고』(牧隱詩藁) 35권과 『목은문고』(牧隱文藁) 20권을 합친 『목은집』에 담겨 있다.

현재 이색 초상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이색 초상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화법(畵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회화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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