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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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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초상(崔瑩 肖像)은 고려후기 명장이자 재상이었던 최영(崔瑩, 1316~1388)의 전신을 그린 초상화로, 1854년(철종 5년) 27세손인 최규영이 주축이 되어 청주목 북면 금천마을에 건립한 기봉영당(奇峰影堂)에 봉안되어 전한다.

초상화 속의 최영은 거의 정면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살짝 올라간 눈썹과 강인한 눈, 큰 코, 굳게 다문 입, 그 아래로 하얀게 변한 수염을 그려 놓았다. 옷은 붉은 색의 관복을 입고 있으며, 검은 색 원형 장식이 있는 관대를 차고 있다. 옷의 주름은 형식적이면서도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늠름하고 강인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최영은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우달치(于達赤)가 되었고, 1352년(공민왕 1년)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護軍)에 올랐으며 1354년(공민왕 3년) 대호군(大護軍) 때 원(元)의 요청으로 중국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벌하고 귀국,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수복했다. 1358년(공민왕 7년)에는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이후 1359년(공민왕 8년)과 1361년(공민왕 10년)의 홍건적의 침입을 무찌르고 1363년(공민왕 12년)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했던 김용을 제거함으로써 그 공을 인정받아 훈 1등에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이 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왜구의 칩임과 반란을 평정하여 1384년(우왕 10년)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이서⋅이동의 땅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된 최영은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고,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1390),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군사 3만 8,800여 명을 보내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함에 따라 요동정벌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위화도 회군으로 기세를 높인 이성계의 원정군에게 도성은 점령하였고, 최영 역시 개성에서 이성계 일파에게 붙잡혀 고봉현(高峯縣)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고양⋅마산⋅충주 등지에 유배된 뒤, 1388년(우왕 14년)에 개경(開京)에서 처형되어 현재그의 묘가 있는 경기도 고양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최영 초상은 이목구비를 과장하여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고 채색이 강렬하여 무신도(巫神圖)의 양식적 특징과 유사하다고 평가받는데 아마도 최영의 초상화가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신도의 도상을 원용하여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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