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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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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는 조선 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조선 왕조의 사당으로서, 사직단(社稷壇)과 함께 조선 시대에 가장 큰 제사를 지내던 장소이다. 종묘는 1963년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은 1985년에 각각 국보 제227호와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었다.

유교 사회에서는 왕이 나라를 세우면 반드시 종묘(宗廟)사직(社稷)을 세워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며 신에게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고대 중국에서부터 왕이 도읍을 정하면 궁전 왼편에는 종묘를 세우고 오른편에는 사직을 세우는 전통이 이어졌다. 조선 또한 이 전통에 맞춰 1394년(태조 3년)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의 명에 따라 도성의 서쪽에 종묘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공을 하고, 개성(開城)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신주를 가져 와서 모셨다. 그러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종묘가 불에 타자, 1608년(선조 41년) 종묘의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며 공사를 개시하여,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완성하였다.

정전은 본래에는 태실(太室) 7칸, 좌우 익실 각 2칸이었던 것을 여러 번 증축하여, 현재는 정면 19칸, 측면 3칸, 좌우 익실(翼室)이 각각 3칸에 이른다. 정전의 정문 담장 안 동쪽에 위치한 공신당(功臣堂)은 정면 16칸, 측면 1칸 크기이며, 영녕전은 정면 4칸, 태실 4칸, 좌우 익실 각각 6칸의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의례 공간의 위계 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달리하는 것도 특징적인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종묘는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선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로써, 종묘 제도의 발생지인 중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전에는 현재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모시고 있는데, 서쪽을 상(上)으로 하여 제1실에 태조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그 외의 왕과 왕후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데, 이것은 공덕이 높아 세실(世室)로 모시기로 정한 제왕 이외의 신주는 일정한 때가 지나면 조묘(祧廟)로 옮겨 모시는 조천(祧遷)을 따른 것으로, 현재 영녕전에는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또한 정전 뜰 앞에 있는 공신당(功臣堂)에는 황희(黃喜)를 비롯한 조선 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각 계절과 섣달에 대제를 지냈고, 영녕전에서는 매년 봄, 가을과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다. 특히 대제를 지낼 때에는 종묘 제례를 봉행하였는데, 각 제사 의례에 맞추어 기악과 노래,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 함께 거행되었으며, 이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종묘사직과 함께 조선왕조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며 유교 이념에 대한 상징이었다. 특히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했던 조선에서 종묘종묘에 있는 역대 왕들의 신주는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보다 먼저 종묘가 복구되었던 것이다. 종묘를 통해서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하며 제후국을 자처했던 모습, 왕이 조상에게 정성껏 제사를 지내고 관료들이 이에 참여함으로써 왕권 강화와 그 유지를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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