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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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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어진(朝鮮太祖御眞)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1335~1408, 재위 1392~1398) 이성계(李成桂)의 초상화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시기의 초상화 기법을 알 수 있게 한다.

가로 150㎝, 세로 218㎝ 규모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조선 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는 1점만이 남아 있다. 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어깨와 앞가슴에 황룡을 수놓은 청포(靑袍)를 입은 채로, 용상(龍床)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태조의 모습을 공식적인 어진도상(御眞圖像) 형식으로 그렸는데 이는 명(明)나라 태조인 주원장(朱元璋, 1328~1398, 재위 1368~1398)의 초상화와 유사하다.

한편 조선 태조 어진의 기법을 보면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기법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데, 옷의 각진 윤곽선은 조선 전기 공신상(功臣像)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채전(彩氈)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조에 이르기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되었으며, 의자에 새겨진 용무늬 역시 공민왕상(恭愍王像)에서도 보인다. 1872년(고종 9) 어진이 너무 낡아 조중묵(趙重默)이 새로이 모사하여 봉안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한 덕에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태조 어진은 1410년(태종 10년) 전라북도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에 어진을 봉안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정읍 내장산 및 아산 등지로 피난을 시켰다가, 1597년(선조 30년)에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에 안치하였다. 그러다가 1614년(광해군 6년)에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묘향산에서 다시 경기전으로 이관하여 봉안하였다. 이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면서 태조 어진은 다시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으로 옮겨졌으며, 1767년(영조 43) 정해년(丁亥年) 대화재 때는 전주향교(全州鄕校) 명륜당(明倫堂)에 피난하기도 하였다. 2010년부터는 경기전 내의 태조 어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2년 국보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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