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조선 시대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의 정비

정도전 초상

※ 가운데 사진을 클릭하시면 이미지 슬라이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정도전 초상(鄭道傳 肖像)은 고려말⋅조선초의 학자이자 조선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초상화이다. 그는 경복궁(景福宮)과 도성의 자리를 정하고, 법전인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편찬하는 등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정도전의 집안은 경상도 봉화 지역의 토착세력이었다. 그는 1362년(고려 공민왕 11년) 과거에 합격한 후, 27세 때 충주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우왕(禑王, 1364~1389, 재위 1374~1388) 재위 시에 원(元)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후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 1335~1394, 재위 1389∼1392) 때 조정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중심으로 한 온건 세력과 정도전조준(趙浚, 1346~1405) 등의 급진 개혁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면서, 1392년 5백 년 역사를 간직한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된 후에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部) 52방(坊)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는 또한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지었는데,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堯舜時代)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정도전은 신하와 임금이 서로 조화로운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꿈꾸었는데, 이것은 신하들이 주도하여 정치를 하고 왕은 이에 대해서 올바른 신하를 등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이방원(李芳遠, 1367~1422, 재위 1400~1418)은 왕의 절대 권력을 주장하면서 정도전과 맞섰다. 특히 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96) 소생인 이방석(李芳碩, 1382~1398)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이에 이방원이성계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1391) 소생들의 불만이 커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정도전이방원은 서로 갈등을 빚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이방원정도전을 숙청하였다. 이후 정도전은 조선 시대 내내 신원(伸寃)되지 않다가,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 때가 되어서야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주요 저서로는 『삼봉집(三峰集)』, 『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이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