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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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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적(軍籍)은 조선 시대에 군인을 징발하기 위하여 신상을 기록한 장적(帳籍)으로, 군호별(軍戶別)로 세계(世系)와 함께 동거하는 아들⋅형제⋅조카⋅사위 등의 씨족 관계까지 함께 작성되었다. 군안(軍案)이라고도 한다.

군역(軍役)은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건강하고 정상적인 남자가 국가에 봉사했던 신역(身役)이었다. 이는 국가 안보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으므로, 조선은 건국 직후 군적 작성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393년(태조 2년)에 20만 800여 명이 군적에 올랐고,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 때에는 호적법(戶籍法) 및 군적의 작성 절차가 정비되었다. 이에 따라 호적에서 추려낸 군역 부과자들이 군적에 올랐는데, 3년에 한 번씩 호적이 작성된 데 비해 군적은 6년에 한 번씩 개수토록 하였다. 군적에는 해당인의 병종(兵種)이 명기되었고, 정군(正軍)봉족(奉足)의 구분이 이루어졌으며 소속 군대까지 표기되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군적은 유사시에는 군사 활동을 위해 국민을 동원하고 평상시에는 국민들에게 국역(國役)을 부과하는 기초 자료가 되었다.

각 읍 군적 작성의 책임은 수령에게 있었지만, 실무는 향리와 더불어 이정(里正), 권농관(勸農官) 등이 군적감고(軍籍監考)가 되어 담당하였다. 이때 향리의 부정부패는 일찍부터 큰 폐단으로 지적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뇌물을 받고 군적 작성을 공정하게 하지 않은 원악향리(元惡鄕吏)에 대한 처벌을 매우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한편 여러 사정으로 군역을 질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군역을 지는 대립제(代立制)도 등장하였는데, 이는 직업적인 대립인의 등장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대립인과 향리들의 농간으로 대립가(代立價)가 폭등하면서 군역제(軍役制)의 파탄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결국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 대에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군역 부담자가 정해진 포(布)만 납부하면 병조(兵曹)는 이 포를 각 부처에 나누어주어 고용한 대립인에게 지급케 하는 제도였다. 군적수포법은 18세기 이후에는 오군영(五軍營) 정병(正兵)을 제외한 모든 병종(兵種)으로 확대되어, 군역의 의무는 1년에 포 2필을 납부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이때 거둬들인 군포(軍布)는 병조의 수입원으로서 국가 재정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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