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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의 연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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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 연행길(輿地圖 燕行路)은 조선에서 심양(沈陽)까지 가는 연행길을 그린 지도로, 크기는 152.5cm× 60cm이고,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의 의주에서 심양을 거쳐 연경(燕京)에 이르는 경로를 상세히 그린 이 지도는 18세기 말기에 제작된 지도첩인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중국을 왕래하는 우리나라 사신들을 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경유지와 함께 청(淸)나라가 국경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목책(木柵) 및 출입문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과 명(明)⋅청(淸)은 사신을 제외한 백성들의 이동과 교역을 금지하였으며, 사신들의 왕래도 육로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들 사신들은 양국 간 의사 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세계의 물산과 문화가 모여들었고,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으로부터 학문과 기술, 사상을 들여왔다. 한편 조선에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사대사행(事大使行)이라고 하였는데, 명나라는 조선의 천자국이었으므로, 명나라의 방문은 ‘조천(朝天)’이라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왕권의 안정 및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고, 명나라와의 무역 등 사대 외교와 국가의 실리를 얻기 위하여 자주 명나라에 조천 사행을 보냈다.

이와 달리 청나라의 경우에는 수도인 연경을 간다는 뜻으로 ‘연행(燕行)’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인 청을 천자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조천 사행에 비하여 연행 사행은 초기에 규제가 상당하였다. 연경에 체류하는 동안 정해진 숙소에만 머물러야 했고, 외부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정해진 길로만 이동이 가능하였다. 또한 국가의 기밀이 샌다는 이유를 들어 지도 등의 품목들을 금수품(禁輸品)으로 정하였고, 현지인들과 말을 주고받는 것도 금지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청나라는 사신들이 북경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이에 사신들은 북경 사람들의 풍족한 삶과 유리창(琉璃廠)의 방대한 서적, 천주당(天主堂)과 관상대(觀象臺), 실측 지도로 표상되는 서구 문명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던 조선 젊은이에게 연행은 큰 배움의 길로 인식되었다. 이에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며 업신여기고 북벌(北伐)척화(斥和)를 주장하던 사람들과 달리 새로운 지식을 원하는 사람들은 사신으로 중국에 가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사신으로 임명되거나, 친인척과 지인이 사신으로 발탁된 덕분에 사신들의 자제군관(子弟軍官)이 되어 연행길에 오른 사람들은 직접 보고 듣고, 대화한 것을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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