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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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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왜관(草梁倭館)은 조선 시대에 왜인(倭人)과 교류를 위하여 1678년(숙종 4년) 부산 초량에 설치하였던 상업적인 관청이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 대부터 왜인과의 교류를 위한 상업적인 관청을 여러 곳에 설치하였는데 이를 왜관(倭館)이라고 한다. 왜관을 설치하였던 목적은 왜구(倭寇)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고 합법적으로 교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경상도 연해안에서 교역을 하였으나, 무질서하게 확장되는 폐단이 발생하였고, 이에 1407년(태종 7년)부터는 경상도 병마절도사 강사덕(姜思德)의 건의에 따라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를 왜인의 교역 장소로 한정시켜 교역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1418년(태종 18년) 염포(鹽浦)가배량(加背梁)에도 왜관을 추가로 설치하였고 상경하는 왜인들을 위해서 한양에는 동평관(東平館)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출몰이 점차 증가하자 1419년(세종 1년) 쓰시마 섬(對馬島) 정벌을 하면서 왜관을 폐쇄하였다가, 쓰시마도주[對馬島主]의 간청으로 1423년 다시 부산포와 내이포 두 곳을 다시 허락하였다. 이어 1426(세종 8년)년에 염포를 추가함에 따라 왜관삼포 제도(三浦制度)가 마련되었으나, 1544년(중종 39) 부산포를 제외한 다른 곳의 왜관은 모두 폐쇄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면서 부산포의 왜관도 폐쇄되었다가 1607년 국교가 재계되면서 부산포가 개항됨에 따라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두모포에 왜관을 설치했는데 두모포 포구의 수심이 얕고 배를 정박하기에는 협소해서 왜인들의 청원이 늘어남에 따라 1678년(숙종 4년) 초량(草梁)에 신관을 지어 옮기게 되었다.

초량왜관은 높이 6자, 둘레 1273보의 돌담을 쌓았고 왜인들이 정해진 시간 외에 담을 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6개의 감시 초소를 설치하였다. 동관과 서관으로 구분되었으며, 동관에는 관수왜가, 재판왜가, 개시대청이 있었고, 서관에는 동대청, 중대청, 서대청이 있었다. 이외에도 왜관에는 필요할 때 마다 여러 건물들이 들어섰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쟁의 여파로 일본의 사신들과 교역을 원하는 왜인들이 조선 초기처럼 내륙으로 이동하거나 한양으로 상경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교역 업무를 초량왜관에서만 처리해야 하였으므로, 초량왜관은 내부 시설이 점차 넓어지고 규모가 확대되어 면적이 11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부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교역 물품은 다양하였지만 조선에서 생산되는 인삼과 중국에서 들여오는 비단, 쌀 등이 주요 물품이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일본 공사관이 초량왜관에 설치되었으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의 거주지와 교역은 더 이상 초량왜관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반도 전역에 이르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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