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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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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초상(趙光祖 肖像)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 대에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賜死)된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초상화이다.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 대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고자 사림(士林)들을 임용하였다. 이들은 이전까지 정치를 주도하던 훈구파(勳舊派)들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비리를 문제시하며 새로운 조선 사회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림파(士林派)훈구파 출신 공신 세력들의 견제로 중종 즉위 직후에는 별다른 개혁을 실시하지 못하다가, 중종 즉위 8년여가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 중종이 주목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였다.

조광조의 본관은 한양이며,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함경도 지방에서 지방관을 역임하던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에서 거주하다가, 마침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김굉필(金宏弼, 1454~1504)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인이었으므로, 조광조는 자연스럽게 김종직 이후의 사림 세력을 계승하게 되었다. 1510년(중종 5년) 소과생원시에 입격한 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이상 정치, 즉 도학 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해 보고자 하였는데, 도학정치란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와 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 289)가 정립한 정치로써, 그 원류는 유학의 이상시대인 요순시대(堯舜時代)의 정치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는 민본정치를 대의로 내세우고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임금의 철저한 수신(修身)을 비롯해 조정 내 언로의 확충을 강조하였으며, 과거제의 대안으로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였다. 또한 성리학적 사회 윤리를 정착하고자 성리학적 생활 규범을 규정하여 생활화는 차원에서 『소학(小學)』 및 향약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 사회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를 영수로 하는 당대 사림파는 대부분 젊은이로서, 현실을 헤아리기보다는 이상을 실현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그 수단이 매우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며, 훈구파와의 알력과 반목도 상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 등은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광조 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훈구파 출신의 공신 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결국 훈구파는 당시 자주 발생하던 지진을 이용하여 민심이 조광조에게로 돌아가고 있다고 중종에게 간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뜻의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문구대로 벌레가 잎을 파먹게 하여 그것을 중종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종 또한 사림파의 과격한 정책에 염증을 느끼면서 훈구파를 지지하게 되었는데, 이에 훈구파는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고,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이다. 이때 조광조 이하 많은 사림들이 하옥되었다가 먼 곳으로 귀양 보내졌으며, 얼마 뒤에 조광조 이하 70여 명이 사약을 받았다. 이때에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한편 조광조선조(宣祖, 1552~1608) 대에 신원(伸寃)되어 문묘(文廟)에 종사되었으며, 이후 전국의 사당과 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암집(靜庵集)』이 남아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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