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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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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초상(李滉 肖像)은 조선의 학자인 이황(李滉, 1501~1570)을 그린 초상화이다. 이황성리학을 바탕으로 내면의 수양을 강조하였으며 사회 주도층으로서 성리학의 토착화에 힘을 썼다.

1501년(연산군 7년)에 경상도 예안에서 출생한 이황은 12살이 되던 해에 숙부 이우(李堣, 1469~1517)로부터 『논어(論語)』를 배우기 시작하며 학문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그는 『주역(周易)』에 한 때 몰입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는 『심경부주(心經附註)』에 심취하였다. 『심경부주』는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인 진덕수(眞德秀, 1178~1235)가 지은 『심경(心經)』에 정민정(程敏政, ?~1499)이 주석을 붙인 책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성리학자의 필독서였다. 이후 이황은 홍문관 수찬이나 성균관 사성 등의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더욱 학문에 매진하였고, 그 결과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통해 주자(朱子)의 저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황성리학과 관련한 다양한 저술을 내놓았다. 아울러 이황은 학문에 접근하는 데에 있어 매우 유연한 태도를 취했는데, 59살이 되던 해에 33살의 어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사단(四端)칠정(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인 것이 그 예이다. 논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황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한편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인 기대승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정치와 사회 등의 분야에서 사림이 주도층으로 등장하였는데, 이황은 바로 이러한 때에 국가와 사회 운영 방식에 대한 논리를 제공하였다. 향약의 제정 및 서원의 보급이 바로 그것인데, 이황은 먼저 향촌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제정하여 향촌 사회가 피폐해지는 것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사림의 육성을 위하여 서원에 관심을 가졌는데, 1550년(명종 5년) 풍기 군수 시절,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대한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설립하였으며, 아울러 서원을 단지 제향 공간이 아닌 학문 연마의 공간으로 그 성격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서원 보급에 힘을 쏟아 상당수의 서원 건립에 참여하였는데, 이황의 이런 활동을 통하여 이른바 조선 서원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말년에 들어서서는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치기도 하였다. 『성학십도』는 그림을 통하여 성리학을 표현한 것으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군주학인 성학(聖學)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당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상당한 파급력을 가져서 이른바 퇴계학파(退溪學派)라는 큰 맥을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문집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 내 주자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퇴계 이황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년)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평가되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의 성리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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