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조선 시대성리학적 사회 질서의 확립

이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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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초상(李珥 肖像)은 조선 시대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더불어 성리학의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이이(李珥, 1536~1584)의 초상화이다. 이이는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경장론을 제시하였고, 이를 위하여 동서로 갈라져 있는 국론을 통일해야 한다며 조제보합론을 주장하였다.

이이는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이며, 1536년(중종 31년)에 아버지 이원수(李元秀, 1501~1561)와 어머니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 1504~1551)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사임당 신씨의 친정이던 강릉 오죽헌(烏竹軒)으로, 결혼 이후에도 사임당 신씨는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37살 되던 해 집안 살림을 맡아 하면서 서울의 시가로 거주지를 완전히 옮겼다. 이것을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 하며, 16세기까지 우리나라의 보편적 결혼 풍습이었다.

6살 때 서울 본가로 온 이이는 이후 과거에서 9번이나 장원을 하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이이는 약 20여 년간 관직생활을 하면서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과 폐단의 변통을 주장하였는데, 집과 국가를 비교하며 이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즉 아무리 좋고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상한 곳이 생기고 집이 기울게 마련이듯이 나라도 시대가 달라지면 처음에 만든 제도의 결함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국가 전체가 무너질 위기를 맞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된 집을 유지하려면 유능한 기술자를 시켜 기둥을 갈고 수리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국가도 달라진 시대에 맞게끔 제도를 고쳐야 하며 바로 이것이 경장(更張)이라고 하였다. 더불어 이이는 당대 조선이 국가와 백성 모두 큰 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원기가 모두 쇠진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다며, 이러한 때에 반란 혹은 외세 침략이 발생하면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이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초반부터 자신의 경장론을 담은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의 시무 관련 상소를 올렸으며, 1575년(선조 8년)에는 유교적 이상을 담은 제왕의 정치교과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그러나 이이의 경장론은 사림동인서인으로 분열된 당시 상황에서는 수용되기 힘든 이론이었다. 그리하여 이이는 당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동인서인의 명목을 타파하자고 호소하였으나, 현실은 이이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이에 이이는 동⋅서 갈등의 당사자인 심의겸(沈義謙, 1535~1587)과 김효원(金孝元, 1542~1590)에게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제기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이이의 경장론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그의 사후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면서이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대책 마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이의 경장론과 다양한 변통책을 비로소 진지하게 검토하였고, 이를 통하여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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