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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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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병산서원(安東 屛山書院)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으로, 안동의 서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류성룡은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일찍부터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발탁하여 전쟁의 승기를 잡았으며, 성곽 수축⋅화기 제작을 비롯하여 군비 확충에도 힘써 많은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징비록(懲毖錄)』을 작성하여 임진왜란의 전모를 남기기도 하였다.

안동 병산서원의 원래 이름은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풍산 류씨(豊山柳氏)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다가 1613년(광해군 5년)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등 지방 유림(儒林)들이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이어 1620년(광해군 12년) 유림의 공론에 따라 이황(李滉, 1501~1570)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류성룡의 위패를 옮겼으나, 1629년(인조 9년)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다시 모셨다. 그리고 류성룡을 주벽(主壁)으로 그의 셋째 아들인 류진(柳袗, 1582~1635)의 위패도 함께 배향하였다. 이후 1863년(철종 14년)에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 서원이 되었다.

서원은 지방의 선비들이 학문적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후학들을 모아 가르치던 곳인 동시에 지방 사림들을 집결시키는 중심지 역할도 하였다. 이러한 서원은 중앙의 당파(黨派)와도 관련되어 당쟁(黨爭)에도 영향을 끼치는 등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서원 철폐령을 실시하였는데, 많은 학자를 배출한 안동 병산서원은 훼철에서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현재 안동 병산서원에는 존덕사⋅입교당(立敎堂)⋅신문(神門)⋅전사청(典祀廳)⋅장판각(藏板閣)⋅동재(東齋)⋅서재(西齋)⋅만대루(晩對樓)⋅복례문(復禮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건립 당시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울러 류성룡의 문집 등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1978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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