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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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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測雨器)는 1442년(세종 24년)에 발명된 과학 기구로, 세계 최초의 강우량을 재는 기구이다.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농업 발전을 위하여 조선의 환경에 맞는 농업서를 편찬하고, 관리들이 농업을 잘 살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백성들의 생활 안정뿐만이 아니라 안정적인 세수 확보를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1441년(세종 23년) 당시 세자였던 문종은 연간 강수량 확인 및 강수량과 농작물 등의 관계 등을 정확하게 조사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강우량 측정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보고 그릇에 빗물을 받아 그 양을 재는 방식을 시험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가 그해 8월 호조(戶曹)에 의해 세종에게 보고되었고, 빗물을 받는 그릇의 규격과 제작에 관하여 몇 가지 수정을 거쳐 일정 기간 동안 원통에 담긴 빗물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측우기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 측우기를 바탕으로 이듬해인 1442년(세종 24년) 5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정하였다. 서울의 서운관(書雲觀)을 비롯하여 각 지방 관청의 뜰에 측우기를 설치하여 전국적인 우량관측망을 구축하였고, 관측 규정에 따라 관측 내용을 보고하게 하였다. 이러한 측우기를 이용한 강우량 측정은 15세기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량화된 기상 관측 방식이기도 하였다.

세종 대에 만들어진 측우기는 1639년(인조 17년) 이탈리아의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가 만든 것보다 무려 200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 세계 최초의 측우기이다. 처음에는 쇠로 측우기를 만들었으나, 뒤에는 구리로 만들기도 하였고, 지방의 경우에는 자기(磁器)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부품의 하나인 받침대를 제외하고는 세종 대에 만들어진 측우기는 모두 사라졌고, 이후에 만들어진 측우기만이 남아 있다. 1837년(헌종 3년) 만든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측우기이며,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측우기를 이용한 측우 기록 역시 조선 후기 서울의 강수량을 알게 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측우기를 이용한 관측 및 보고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측우 제도가 와해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초기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1770년(영조 46) 때 측우 제도를 재건한 이후 측우기를 통하여 관측한 서울의 우량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약 140년의 기록과 현대의 관측 기록까지 합치면 약 240년 간의 서울 우량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정 지역의 우량 기록에 관한 세계 최장 관측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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