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조선 시대왜란과 호란의 극복

이순신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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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초상(李舜臣肖像)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초상화이다.

이순신은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변수림(卞守琳)의 딸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28세가 되던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실격하였고, 4년 후인 1576년(선조 9년)에 식년 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591년(선조 24년)에는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진도 군수(珍島郡守)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左水營)에 부임한 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이순신은 5월 7일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였고,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는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그리고 7월 한산도 해전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이어 안골포(安骨浦)로 전진하여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으며, 이 기세를 몰아 9월에는 일본 수군의 근거지였던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소탕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겼으며, 이어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명(明)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후에, 장문포해전을 치뤘다. 이 해전 당시 이순신은 육군과 합동 작전을 펼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일본군의 서해안 진출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한편 1597년(선조 30년)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날짜를 거짓으로 흘리도록 하였는데, 이순신은 일본의 계략임을 알면서도 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에 들어온 뒤였으므로, 결국 이순신은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우의정 정탁(鄭琢, 1526~1605)의 변호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고, 바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1537~1599)의 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 해 7월 후임 원균(元均, 1540~1597)이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자,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고, 13척의 함선으로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어 1598년(선조 31년)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 1543~1607)과 연합하여 철수를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그를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이어 그는 1604년(선조 37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1643년(인조 21년) 인조(仁祖, 1595~1649)가 ‘충무’ 시호를 내렸고, 1659년(효종 10년)에는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이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이어 1688년(숙종 14년)과 1705년(숙종 31년) 명량대첩비와 현충사(顯忠祠)가 각각 설립되었다. 1793년(정조 17년)에는 다시 영의정을 가증하였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있다. 통영 충렬사(忠烈祠)와 여수 충민사(忠民祠), 그리고 아산 현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현재 그의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亂中日記)』가 포함된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순신 유물 일괄(李舜臣 遺物 一括)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통영 충렬사 팔사품 일괄(統營 忠烈祠 八賜品 一括)은 보물 제440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한편 영의정 복장을 하고 있는 그의 초상화는 그가 살아있을 때 그린 것이 아니다. 생전에 그는 영의정의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으나,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므로, 이에 준하여 초상화를 그린 것이라 하겠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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