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조선 시대왜란과 호란의 극복

사명대사 유정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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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大邱 桐華寺 泗溟堂 惟政 眞影)은 대구광역시 동화사 조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시대의 승려 사명대사(泗溟大師, 1544~1610)의 초상화이다. 크기는 가로 78.8cm, 세로 122.9cm이며, 2006년 보물 제1505호로 지정되었다.

의자에 앉아 가부좌한 전신상으로 손은 불자(拂子)를 잡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다. 백색 장삼은 굵은 필선으로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붉은 가사는 섬세한 무늬로 화려하게 그렸다. 조선 전기의 공신도상(功臣圖像) 등에서 볼 수 있는 필법으로 날카롭게 치켜뜬 두 눈이나 균형 있는 이목구비의 조화, 승상에서는 보기 힘든 수염 등을 그렸다. 다른 사명대사의 진영들에 비하여 긴 수염이 특징이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10여 점의 사명대사 진영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제작 시기는 가경년간(嘉慶年間)이라 표기되어 있다.

사명대사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때의 승려로 속성은 임씨(任氏), 이름은 유정(惟政)이며, 자(字)는 이환(離幻),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1561년(명종 16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년)에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의 법을 이어받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사명대사는 승병을 모집하여 서산대사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에는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 1537~1599)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당상관(堂上官)의 위계(位階)를 제수받기도 하였다. 1594년(선조 27년)에는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진중(陣中)을 3차례 방문하여 화의(和議) 담판을 하면서 적의 동태를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과 순천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후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고, 이어 1604년(선조 37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임무를 띠고 국왕의 친서(親書)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와 강화를 맺었다. 그 결과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사명대사가 이들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사명대사선조가 승하한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입적하였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義兵) 및 승병(僧兵)의 역할이 매우 컸다. 조선 시대에 불교는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말미암아 많이 위축되었지만, 승려들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 모두 집결하여 의병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왜군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승병은 그 외에도 축성 작업에도 참여하여 방어에도 힘썼다. 이렇듯 많은 승려들이 국가에 위기가 닥치자 힘을 합쳐 나라를 지켜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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