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조선 시대왜란과 호란의 극복

김충선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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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 기념비(金忠善 紀念碑)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으로 침입하였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박진(朴晉, ?~1597)에게 귀순한 일본인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을 기념하는 비(碑)이다.

김충선의 본명은 사야가(沙也加)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이다. 조선으로 귀순한 뒤에는 각종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는데, 경주⋅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첨지의 직함을 받았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손시로(孫時老) 등의 항복한 왜장들과 함께 의령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하였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1537~1599)과 어사 한준겸(韓浚謙, 1557~1627) 등이 주청하자 성명을 하사하였다. 아울러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야인들의 침입으로 변경이 소란하자 종군을 자원하여 10여 년 동안 방수(防戍)에 봉직하였으며, 이에 1613년(광해군 5년)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 1587~1624)의 난 때, 이괄의 부장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어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643년(인조 21년) 외괴권관(外怪權管)으로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중 청(淸)나라 칙사의 항의로 해직되어 대구의 녹리(鹿里)로 돌아왔다. 목사(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가훈⋅향약 등을 마련하며 향리 교화에 힘썼다. 문집으로는 『모화당문집(慕華堂文集)』이 있다.

한편 1789년(정조 13년) 대구 지역 문인들은 녹동서원(鹿洞書院)을 건립하여, 김충선의 위패를 모셨다. 녹동서원은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885년(고종 24년)에 재건되었으며,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렇듯 임진왜란 중에는 일본에 귀순하거나 끌려간 사람도 많았지만, 반대로 조선에 귀화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에는 김충선과 같이 귀화 후 조선에서 큰 역할을 하던 인물도 있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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