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조선 시대왜란과 호란의 극복

광해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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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광해군 묘(南楊州 光海君墓)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과 그 부인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柳氏, 1576~1623)의 묘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위치한다.

서자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는 왕위를 이을 대군을 바랐지만, 55세가 되던 1606년(선조 39년)이 되어서야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얻을 수 있었다. 이때의 세자는 광해군이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국난에 대비하기 위하여 세자로 책봉된 이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여 많은 신하와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조는 자신의 생각대로 세자를 교체할 수가 없었고, 그런 가운데 선조가 사망하면서 광해군은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명(明)나라와 청(淸)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임진왜란 파병으로 세력이 약해진 명나라와 명나라를 공격하는 후금 사이에서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중립 외교를 펼쳤다. 아울러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과 호적 조사 사업 및 공납제대동법으로 바꾸는 등 빈민 구제에 주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쟁으로 부서진 궁궐을 재건 및 수리하는 데에 많은 재정을 기울여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였으며, 왕권을 둘러싸고 형인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서모(庶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폐위하여 경운궁(慶運宮)에 유폐(幽閉)하였다.

결국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 서인(西人)들이 주도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은 폐위되었는데, 이때 그들은 어머니를 유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반정(反正)의 명분으로 삼기도 하였다.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 즉위 후, 1623년(인조 1년) 3월 광해군으로 강봉되었으며, 이어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리고 1641년(인조 19년) 7월 제주도에서 죽어 그 곳에 장사지냈다가 1643년(인조 21년) 10월에 지금의 묘소로 이장하였다.

문성군부인 유씨는 지돈녕부사 유자신(柳自新, 1541~1612)의 딸로 1587년(선조 20년)에 광해군과 혼인하였고, 1591년(선조 24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623년 광해군과 함께 폐출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으며, 그해 아들 폐세자와 며느리 폐세자빈이 목숨을 끊고, 친정 형제들인 유희분(柳希奮, 1564~1623)과 유희발(柳希發, 1568~1623)이 참형(斬刑)을 당하는 등의 일을 겪었다. 결국 10월 강화도에서 죽어 광주군 적성동에 장사지냈다가, 광해군이 죽은 뒤 같은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묘는 쌍분(雙墳)이며, 3면의 곡장(曲牆)에 둘러싸여 있고, 두 무덤 앞에는 혼유석(魂遊石)⋅향로석(香爐石)⋅묘비가 있다. 그 외에는 장명등(長明燈)1개와 문인석(文人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이 있으나, 폐위되었기 때문에 왕릉에서 보이는 난각석(欄干石)과 동물 석상, 무인석(武人石) 등은 갖추지 못하였다. 묘비의 전면에는 ‘光海君之墓(광해군지묘)’, 후면에는 ‘辛巳七月初一日病卒於濟州命輟朝三日(신사칠월초일일병졸어제주명철조삼일)’이라 새겨져 있다. 광해군 묘 뒤쪽으로는 광해군의 형 임해군과 생모 공빈 김씨(恭嬪金氏, 1553~1577)의 무덤 등이 있다.

1991년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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