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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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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蕩平碑)는 1742년(영조 18년)에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탕평책(蕩平策)을 널리 알리며 확립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불편부당(不偏不黨)하는 군자의 도를 닦게 하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영조는 자신이 왕세제 시절에 당쟁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에, 즉위하자마자 당쟁의 조정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725년(영조 1년) 1월 당쟁의 폐해를 통언(痛言)하면서 붕당을 조성하는 자는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여 국정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탕평책의 하나로 청요직(淸要職)의 자리에 각 파의 인물을 균형 있게 등용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사(政事)의 시비를 논하는 상소를 금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을 고루 등용하는 불편부당의 탕평책을 수립하였으며, 이어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건립하여 본인의 탕평책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탕평비의 비문에는 『예기(禮記)』에 나오는“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데, 영조 자신이 친서하여 비에 새기도록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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