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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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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奎章閣)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가 설립한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자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하던 관서이다.

원래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어필과 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규장각은 그것들을 모아두는 기관이라는 의미이다.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대에 양성지(梁誠之, 1415~1482)의 건의로 설치된 적이 있었으나 곧 폐지되었고, 이후 1776년(정조 즉위년) 3월에 다시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는 기관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하였다.

정조는 즉위 후 “승정원(承政院)이나 홍문관(弘文館)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수건(首建)하였다”고 설립 취지를 밝히며, 창덕궁(昌德宮)의 북원(北苑)에 규장각을 설립하였다. 이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하여 붕당 정치로 어지러워진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은 설립 이래로 기능을 점차 확대하여 승정원⋅홍문관⋅예문관(藝文館)의 근시(近侍) 기능을 흡수하였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 제도(抄啓文臣制度)도 주관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1779년(정조 3년)에는 새로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조선 개국 이래로 서얼이라는 신분의 장벽 때문에 입신을 할 수가 없었던 서얼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이렇게 규장각에서 양성된 학자들은 정조 대의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하였다. 즉 규장각은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 세력 형성에도 깊이 관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장각 소속의 신하들은 승지 이상으로 왕과 친밀하였으며,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한편 1781년(정조 5년)에는 그동안 규장각에서 수집하여 보관하던 3만여 권의 장서를 정리하고, 『규장총목(奎章總目)』이라는 이름으로 도서 목록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도서 수집 외에도 규장각은 편찬 활동도 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매일의 정사를 기록한 『일성록(日省錄)』이다. 그리고 1781년부터는 『내각일력(内閣日曆)』이라는 일기를 기록하였는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이상으로 상세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은 점차 사라지고,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년) 경복궁(景福宮)으로 이동하였으며, 1895년(고종 32년) 규장원(奎章院)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1897년(고종 34년) 다시 규장각으로 이름을 환원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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