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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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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淸)나라 사이에 백두산 일대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 관원들의 현지 답사로 세워졌다.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 같은 바위를 그대로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아서 높이 약 67㎝, 폭 약 45㎝ 정도의 규모의 정계비를 세웠다.

비석을 세우기 전에 압록강⋅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인삼을 캐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조선과 청나라 양국을 왕래하는 사람들 간의 충돌로 두 나라 사이에는 자주 분쟁 사건이 일어났다. 청나라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을 문제 삼아 백두산에 올라가서 국경을 정하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여기에는 청나라 왕실이 자신들의 발상지로 삼는 백두산을 청나라의 영역 안에 넣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1712년 2월 목극등 등이 변경을 조사하고자 하니 협조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이어 그 해 4월 목극등 일행이 파견되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1658~1715)을 보내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 1646~1721)와 함께 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 조정은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 국경을 정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접반사와 함경 감사 등이 늙고 허약하여 백두산을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뒤떨어지면서, 조선인 관원들만 따라 국경 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목극등의 의사대로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km 지점인 2,200m 고지에 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정계비에는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오십오년오월오일(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五日)”으로 조사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어 청국인 수행원으로 “필첩식(筆貼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를 적고 아래에 조선 관원 6인의 이름도 함께 새겼다. 즉, 백두산정계비를 통해서 한⋅중 두 나라의 경계선이 비로소 그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 비석은 인적이 드문 곳에 세워진 까닭에 세간의 기억에서 잊히다가,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와 일본 등이 이 일대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조선과 청의 정부에서도 이 정계비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조선과 청나라는 토문(土門)의 위치와 관련하여 의견을 대립하였다. 조선에서는 토문을 만주의 송화강(松花江)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청나라에서는 두만강(豆滿江)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9월 만주 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 직후 없어졌는데, 일제가 철거한 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는 상태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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