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주제별조선 시대조선 후기 정치⋅사회 변화

보부상

※ 가운데 사진을 클릭하시면 이미지 슬라이드를 보실 수 있습니다.

보부상(褓負商)은 옹기와 함지박을 파는 등짐장수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그린 권용정(權用正)의 작품으로, 별다른 배경 없이 인물만을 그리고 있다. 크기는 16.5 x 13.3cm이다.

권용정(權用正)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의경(宜卿)이며, 호는 소유(小游)이다. 부사(府使)를 지냈다는 사실과 세시풍속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만 전할 뿐, 가계나 행적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서 “산수를 잘 그렸고 화법은 필력이 굳세고 건장하며 맑고 깨끗하다”고 평하였으나, 현재 『보부상』 외에 전해지는 작품이 없어 확인하기는 어렵다. 『보부상』에서 권용정은 등짐장수의 옷주름을 구불구불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김홍도(金弘道, 1745~?)의 화풍을 반영한 결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부상은 봇짐장수인 보상(褓商)과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부보상(負褓商)이라고도 하였는데,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을 하던 상인이다. 원래는 보상부상이 별개의 조직체였는데, 1883년(고종 20년)에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하면서 ‘보부상’으로 통합되었다. 실제로 보상부상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보상은 주로 정교한 세공품이나 값비싼 사치품을 취급하였던 반면, 부상은 일용품 등의 가내수공업품을 취급하였다. 또한 보상은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팔았으나, 부상은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던 것도 차이점이다. 각지의 시장들을 돌아다니며 상업 활동을 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각 지방의 물화(物貨)를 유통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보부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조선 초에 이미 부상단(負商團)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조선 시대 내내 국가의 일정한 보호를 받으며 상업 활동을 하는 혜택을 받는 대신에 유사시에 종종 동원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행주산성(幸州山城) 전투에 수천 명의 부상이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을 뿐 아니라 전투에도 직접 참여하여 왜군을 물리쳤던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또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부상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한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에게 식량을 운반하였고, 그 결과 정부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 이들에게 생선과 소금 등에 대한 전매권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정치 참여는 조선 후기에도 이어져서 1866년(고종 3년)에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전국의 보부상을 동원하여 프랑스군을 무찔렀으며, 1882년(고종 19년)에는 대원군의 개혁 정치에 불만을 품은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경기도와 강원도의 보부상을 이끌고 서울로 침입한다는 소문이 있어 도성 내에 큰 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 1894년(고종 31년) 동학 농민 운동보부상은 정부군에 합세하여 농민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제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보부상 말살 정책에 의하여 거의 소멸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