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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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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영정(崔濟愚 影幀)은 조선 말기에 발생한 동학(東學)의 교조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영정이다.

최제우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이고,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이다. 부친은 최옥(崔鋈, 1762~1840)이며, 모친은 한씨(韓氏)이다. 몰락 양반 출신으로 10세에는 어머니를, 그리고 17세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우선 국내적으로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여기에 국외적으로는 서양제국주의 세력의 동양 침략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이것들은 바로 전통 시대를 이끌어 가던 조선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최제우는 이러한 국내외적 어려움이 바로 천명(天命)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1856년(철종 7년) 여름 경상도에 있는 천성산(千聖山)에 들어가 구도(求道)를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이름을 제우(濟愚)로 고쳤다. 그러다가 1860년(철종 11년) 4월 5일 하느님에게 정성을 드리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공중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를 듣는 종교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종교적 신념을 결정적으로 확립하게 하는 계기였으며, 이후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여,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었다.

이듬해인 1861년(철종 12년) 최제우는 경주에서 본격적으로 포교를 시작하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경주 내 지배층에서는 서학(西學)동학의 관련을 주장하였고, 이에 최제우는 그해 11월 경주를 떠났다가, 이듬해인 1862년(철종 13년) 3월 다시 경주로 돌아왔다. 최제우가 돌아오면서 동학의 교세 또한 눈에 띄게 확장되자, 그해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 체포하였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의 청원으로 무사히 석방된 최제우는 그해 12월 늘어난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接主制)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었다.

이런 가운데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는 제자 20여명과 함께 최제우를 경주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는데, 그런 중에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이 사망하였다. 이에 1864년(고종 1년) 1월 최제우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하도록 하였으며, 이곳에서 심문을 하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형에 처하였다. 당시 최제우의 나이 41세였다.

그의 처형 후 신도들은 그의 글을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동학의 교리를 정리한 것이기도 하였으므로 이후 교리서 역할을 하였다. 한문체를 엮은 것이 『동경대전(東經大全)』이고, 가사체를 모은 것이 『용담유사(龍潭遺詞)』이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최제우는 하느님은 초월자이지만 부모님처럼 섬길 수 있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며,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함과 동시에 인간 밖에 존재하는 초월자의 성격을 지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존엄성 및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강조하였으며, 많은 백성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최제우의 등장과 활동은 조선 말기의 어지러운 상황을 대변하는 것으로 당시의 백성들이 국내외의 정치⋅경제적 혼란에 힘들어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동학의 신분 평등관과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갈망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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